자치소식

“농인의 소통력·사회 적응력 높여줄 것”

광진구, 청각·언어 장애인 위한 수어통역센터 개소 10주년 맞아

등록 : 2023-02-0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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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 수어통역센터는 2012년 개소해 지역 청각·언어 장애인의 의사소통과 사회 적응력 향상을 돕고 있다. 2020년 지하철 2호선 구의역 근처로 옮겨 접근성도 좋아지고 공간도 넓어져 농아인 쉼터도 마련했다. 1월25일 자양동 밝은미소치과 진료실에서 수어통역사 박준수씨가 농인 김철근씨에게 의사의 “‘앙’ 물으라”라는 말을 수어로 전하고 있다.

2012년부터 생활 속 의사소통 지원

3년 전 공간 이전, 농아인쉼터 운영

연인원 1만5천여 명 ‘통역·상담’ 이용

공간 안정성, 통역사 충원 등 과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해 진료 때 답답했는데, 할 말을 다 할 수 있어 속이 시원해요.”

설 명절 연휴가 끝난 다음날인 1월25일 오후 광진구 자양동 밝은미소치과 진료실에서 농인 김철근(59)씨가 치과 진료를 받고 수어로 이렇게 말했다. 진료 때 김씨 옆에서 광진구 수어통역센터의 농인 통역사 박준수씨와 청인(비청각장애인) 통역사 하지영 대리가 의사와 간호사의 말을 손짓, 몸짓, 표정으로 부지런히 전달했다.

“‘앙’ 물으라고 해주세요.” “높이를 맞추는 과정이니 좀 불편할 거예요.” 의사와 간호사는 연신 두 통역사에게 수어통역을 부탁했다. 임플란트 시술이 끝나자 김씨는 “통역사님들 덕분에 진료를 안심하고 받을 수 있어 너무나 감사하다”고 수어로 말했다.


김씨는 수어통역센터의 통역과 상담 서비스를 2015년부터 이용해왔다. 특히 병원이나 은행, 공공기관 등을 갈 때마다 서비스를 신청한다. 이전엔 청인 가족의 도움을 받았는데,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김씨는 “주중 업무시간에는 센터의 통역서비스를 이용하면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면서 “평균 주 3~4회 정도 이용하는데 만족스럽다”고 했다.

광진구에 거주하는 청각·언어 장애인은 1400여 명이다. 전체 등록 장애인의 14% 정도다. 지역에 건국대병원, 혜민병원 등 중대형 병원이 여럿 있어 농인의 진료 수어통역 수요가 많은 편이다. 광진구 수어통역센터는 2012년 서울의 23번째 수어통역센터로 문을 열었다. 앞서 서울농아인협회 광진구지회가 만들어졌고 센터 개소로 이어졌다. 석철민 센터장은 “아무것도 없는 10여 평 공간에 사무실과 집기를 하나씩 마련하며 지역 농인들의 의사소통을 도울 수 있어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석 센터장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2021년 장애인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현재 센터에는 석 센터장과 함께 수어통역사로 청인 4명과 농인 1명이 청각·언어장애인의 의사소통 지원, 상담 등을 맡고 있다. 수어통역서비스는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지원된다. 특히 병원, 관공서, 은행, 법원 등에서 많이 이뤄진다. 주민센터 안내문, 공공기관 우편물 등의 내용에 대한 상담도 많다.

지난해 연인원 1만5천 명이 수어통역과 상담 서비스를 이용했다. 10년 새 3배로 늘었다. 수어통역사 박판휘 과장은 “농인은 물론이고 병원 등 기관에서 수어통역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는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 같다”고 풀이했다.

농인들이 설 명절 연휴 다음날 쉼터에 모여 함께 놀이를 즐기고 있다.

2020년 센터는 광진구청의 지원으로 접근성이 좋고 넓은 현재의 공간으로 이사했다.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걸어 5분 걸리는 곳으로 255㎡(77평) 규모다. 개방형 공간에 농아인 쉼터도 마련했다. 쉼터는 복지시설을 이용하기 어려운 농인이 문화 여가를 즐기고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편의시설을 갖췄다.

농아인 쉼터는 코로나19 상황이 진정되면서 지난해부터 문화, 체육, 교육 프로그램을 단계별로 다시 열고 있다. 쉼터 운영을 맡은 수어통역사 배정남씨는 “평생교육원, 문화센터 등과 연계해 강사를 소개받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며 “스마트폰 이용법, 키오스크 사용법 등 정보화 교육도 할 계획이다”라고 했다.

치과 치료를 받은 뒤 김철근씨는 수어통역사들과 함께 쉼터를 찾았다. 한파에도 농인 네댓 명이 모여 놀이를 하고 있었다. 쌓여 있는 나무젓가락을 하나씩 빼내는 게임이다. 박판휘 과장은 “농인들은 명절 때 가족이나 친척들 대화에 끼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쉼터에 와서 어울리며 답답함을 푼다”고 했다.

놀이하던 농인 류종균(50)씨는 “쉼터에 와서 우리끼리 즐기며 다들 좋아한다“고 했다. 류씨는 “코로나19로 제대로 하지 못한 운동이나 나들이 프로그램이 빨리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수어통역사 하지영 대리는 “쉼터를 자주 찾는 이용자들의 표정이 점점 밝아진다”며 “하고 싶은 게 점점 늘며 당당하게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 참 보기 좋다”고 했다.

광진구 수어통역센터와 농아인 쉼터 입구 모습.

센터는 다양한 연령층의 이용과 공간 안정성 확보, 통역사 충원 등의 과제를 안고 있다. 현재 센터를 이용하는 농인 대부분이 중장년층이다. 젊은층 농인이 더 많이 이용할 수 있으려면 홍보를 늘릴 필요가 있는데 개인정보 보호법에 의한 제한이 있다. 공공기관의 적극적인 도움이 아쉬운 부분이다. 농인이 지속해서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장기적으로 안정된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 좋은데 구청 지원으로 마련한 센터의 5년 임대 계약이라 만료된 이후에 대한 고민도 있다.

운영 평가에 대한 보완과 통역사 충원에 대한 바람도 있다. 병원 통역서비스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상담과 동일하게 한 건으로 처리되고 있다. 건수 기준의 평가 방식에 개선이 필요한 이유다. 지역에 다문화 농인이 있어 국제 수어를 할 수 있는 통역사도 있어야 한다. 석 센터장은 “프로그램 운영과 지역 특성을 반영한 수어통역을 위한 통역사 충원이 필요하다”며 “센터와 쉼터가 농인의 의사소통 장벽을 낮추고 사회 적응력을 높여주는 곳으로 역할을 할 수 있게 인적·물적 지원이 늘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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