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향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주택가 이면도로 사거리 모퉁이에 자리 잡은 시흥4동 주민센터는 간판만 아니라면 카페 또는 어린이집처럼 보였다. “여기 주민센터는 서울시가 ‘찾아가는 동주민센터’(이하 찾동)의 성공 사례로 꼽는 곳입니다.” 차성수(59) 금천구청장의 자랑이었다. 금천구는 지난해 찾동 시범구로 지정을 받아 복지생태계 조성을 위한 동 주민센터의 표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찾동은 2015년 시범사업을 거쳐 2016년 7월부터 서울시 전체 동의 절반에 가까운 224개 동에서 실행하고 있다.
시흥4동 주민센터는 지난해 찾아가는 복지 시범사업 과정에서 바퀴벌레가 들끓는 열악한 반지하방에서 월세를 밀린 채 살아가던 세 모녀 가정을 찾아냈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그야말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위기의 가정이었다. 동은 지역사회와 함께 세 모녀의 거처를 마련함은 물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차 구청장은 하마터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송파 세 모녀 사건’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될 뻔 했는데, 그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이웃 간의 연대를 강화한 찾동 사업 덕분이라고 했다. “고독을 뜻하는 ‘solitary’에서 철자 하나만 바꾸면 연대 ‘solidary’가 됩니다. 현대사회의 공고화된 위기 구조를 개선하려면 고립된 사회에서 연대하는 사회로 전환해야 합니다. 지방정부 사업의 핵심을 공동체 복원에 두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시민을 주체로 세우는 일에 노력해야
차 구청장은 금천구가 서울형 마을공동체의 표준을 제시했다는 평가에 만족하지 않는다. 공동체가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지방정부의 권한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본의 골목 침투를 막는 법과 제도만 제대로 만들어줘도 이웃 간의 더 강한 연대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방정부는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중앙정부가 권한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성수 구청장은 진정한 지방분권을 위해서는 ‘시민적 감수성’ ‘시민에게 권한 이양’ ‘시민 주도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행정을 시민의 눈높이에 맞추고 시민이 주도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권한을 이양해야만 진정한 분권이라는 뜻이다. 금천구가 주민들의 뜻을 모으는 마을총회에 많은 공을 들이고, 동 특성화 사업을 권장하고 예산을 지원하는 이유도, 주민에게 힘을 실어야 한다는 차 구청장의 의지 때문이다.
“권한을 밑으로 밑으로 많이 내려야지요. 시민이 주도권을 가져야 마을과 도시, 그리고 나라를 바꿀 수 있습니다. 공공은 시민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공공은 불씨에 불과합니다. 이 불씨가 어떤 불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시민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
금천구는 올해를 마을민주주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10개 동에 각 2500만 원의 예산을 지원했다. 예산은 사용처를 따로 지정하지 않았다. 동 주민들이 마을총회를 거쳐 필요한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동 특성화 사업’을 활성화하라는 뜻이다. 동 특성화 사업은 구체적으로 독산3동 ‘독산극장’, 독산4동 ‘골목길 물놀이장’ 등 지역의 상황에 맞는 사업으로 결과를 내보였다. 주민들은 행정의 수혜자 자리에서 벗어나 이웃과 함께 마을에 필요한 사업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참여자로 성장했다.
금천구는 그동안 동 특성화 사업으로 경험을 쌓은 지역주민의 역량이 구정에서도 발휘될 수 있도록 정책을 세우고 있다. 주민자치위원에게는 마을계획수립 등 다양한 결정 권한을 주고, 지속가능한 사업을 추진할 마을공동체에는 마을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할 예정이다.
“세상은 우리가 예상한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변하는 속도에 맞추려면 혁신이 필요한데, 공공은 일하는 방식이 안정 지향적일 수밖에 없으니 느릴밖에요. 그래서 민간 영역과 함께 일하는 게 필요해요.” 차 구청장의 이러한 생각은 금천구가 전국 최초로 민간 출신 동장을 임명하는 결과로 발전했다. 개방직 공무원 제도가 있긴 하지만 중앙정부나 서울시 정도로 제한돼 운영된 까닭에, 금천구의 민간 출신 동장 임명은 협치 가능성을 확인하는 첫 시험대로 주목받고 있다. 차 구청장은 현재까지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실 민간 영역의 인사가 유입되면 공무원들이 주민을 대할 때 훨씬 편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중간자 역을 해주니 마을 주민들이 관을 대할 때도 도움이 되지요. 성공적인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지방분권 강화해야 삶의 질 나아져
차 구청장은 교수 출신이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등을 거쳐 2010년 민선 5기 구청장으로 선출되었다. “교수는 방향과 원칙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청와대에서는 주로 거시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일을 했어요. 한계가 있었습니다. 중앙만 바뀐다고 다 바뀌는 게 아니거든요. 구청장 업무를 하면서 중앙에서 만든 계획들이 하부 조직에서 어떤 과정을 거치며 작동하는지 깨달았습니다. 이제 실질적인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훈련을 마친 것 같습니다.”
차 구청장은 국민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역할이 철저하게 나뉘어야 한다고 말한다. “중앙정부는 내셔널 미니멈(국민생활최저선, 국가가 국민의 최저 생활수준을 보장한다는 뜻을 담고 있음)을 정하고, 준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맡아야 합니다. 지방정부는 그 위에서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 정책을 펼치는 거지요.” 교육이나 복지 등은 중앙정부가 국민의 최저 생활수준을 지킬 수 있는 기준을 정하고, 나머지는 지방정부에 맡겨야 한다는 이야기다.
차 구청장은 지방분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방치되고 있는 정책이 많다며 노인정책 문제를 예로 들었다. “25만 금천구민 중 15%인 3만2000명이 65세 이상 노인입니다. 8년 후면 노인 인구가 5만 명입니다. 공공이 하는 일이 저소득층 등 어려운 환경의 노인을 돌보는 일밖에 없어요. 중산층 이상의 노인들에 대해 손 놓고 있지요. 이들을 위한 시설과 정책 등을 준비해야 하는데, 정부나 서울시가 나서지 않으면 자치구라도 나서야 하는데, 예산은 안 내려주잖아요.”
금천구는 노인들을 위한 시설인 어르신복지센터를 지역 기업인 대륭의 기부를 받아 짓기로 했다. “중·장년층과 어르신들이 제2의 인생을 준비할 수 있는 쉼터이자 배움터로 만들어 지역 내 복지 균형을 맞출 계획”이라는 게 차 구청장이 어르신복지센터 건립을 서두르는 이유다.
공간 재구성해 금천의 미래에 대응
금천구는 중장기적으로 도시 공간을 재구성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가산동의 노후한 직장여성아파트는 행복주택으로 재건축된다. 구청사 뒤편 군부대 자리에는 미니 신도시가 들어서, 올 11월부터 입주할 예정이다. 구민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의 설립 타당성도 검토하고 있다. 차 구청장은 “이러한 공간 재구성 사업의 핵심은 저출산, 고령화라는 미래사회에 맞는 주민 인프라 확보”라고 말한다. “저출산, 고령화라는 인구구조의 변화가 결국에는 우리의 삶터를 결정할 겁니다. 그래서 그에 맞는 인프라를 만들어야 해요. 노인복지관이나 어린이집, 문화체육센터, 시립미술관 건립 등 미래 금천 주민들의 삶의 질을 유지하고 신장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공간을 재구성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윤지혜 기자 wisdo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