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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짧은 여행이 던진 큰 질문, ‘용산공원 맞을 시민 준비 정도는?’
철도병원과 학교 갖춘 철도도시 용산
이봉창 열사가 ‘민족의식’ 배웠던 장소
‘14번 게이트’는 미군기지 문제 환기
“여의도 면적만 한 미군기지가 반환된 뒤 조성되는 용산공원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지난 13일 오후 용산역 광장에서 만난 강호정 서울문화관광 해설사가 ‘용산 한강대로 이야기길’ 해설을 시작하면서 한 말이다.
‘용산 한강대로 이야기길’은 서울시와 서울관광재단(대표 길기연)이 최근 개발·공개한 새로운 서울 도보해설관광코스(korean.visitseoul.net/walking-tour)다. 서울시와 서울관광재단은 국내외 관광객에게 서울을 깊이 알리기 위해 2003년부터 약 2시간 코스의 도보해설관광을 무료로 진행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궁궐·왕릉·한옥마을·성곽둘레길·도시재생·건축예술 등을 주제로 47개의 코스를 운영해왔는데, 그 48번째 코스로 ‘용산 한강대로 이야기길’을 선보인 것이다.
S 출발 : ‘용산 한강대로 이야기길’의 출발장소인 용산역 광장 한켠에 서 있는 강제징용 노동자상에서 강호정 서울문화관광 해설사(맨 오른쪽)가 서울관광재단의 김승환 대리(맨 왼쪽), 이승훈 주임에게 동상의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용산 한강대로 이야기길’은 용산역 광장에서 시작해 한강대로 양쪽에 있는 ‘철도관사 골목’과 ‘미군기지 14번 게이트’ 등을 살펴본 뒤 삼각지까지 걷는 총 3.5㎞에 이르는 길이다.
해설을 맡은 강호정 해설사(사진 S 맨오른쪽)는 2010년부터 해설해온 베테랑 해설사다. 도보해설관광코스 48곳 전체를 해설할 수 있으며,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영어 해설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날 해설에서 강 해설사는 용산 코스를 꿰는 열쇳말로 ‘병영’과 ‘철도’를 꼽았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한일의정서 제4조 규정을 근거로 용산 일대 118만 평을 강제 수용한 뒤 조선주차군사령부와 20사단을 주둔시켜 용산을 일제의 병참기지로 변모시켰습니다.”
용산은 사실 고려 말에는 몽골군의 병참기지로,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보급기지로 이용됐으며, 1894년 청일전쟁 때도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주둔했던 ‘군사요충지’다. 이렇게 일본군에 장악됐던 용산은 해방 이후 미군정 때 미군기지가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연복사탑 중창비 : 고려시대 개경에 있던 큰 사찰이었던 연복사의 5층 목탑을 태조 이성계가 1394년 다시 세운 건립 내력을 적은 비석. 강호정 해설사는 중창비를 보면서 “어쩌면 그 당시 많은 유물과 유적이 철도를 통해 국외로 반출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고 말했다.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일본은 또한 용산에 주둔한 일본 군인과 병참을 수송하기 위해 용산을 ‘철도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용산역은 1900년 9월5일 첫 영업을 시작했다. 이후 용산은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한 ‘부산~신의주 한반도 종단철도’ 건설의 중심이 됐다. 이에 따라 1905년 1월 경부선이 개통된 데 이어 1906년에는 경의선 전 구간 운행이 개시됐다.
‘용산 한강대로 이야기길’은 용산역과 삼각지역 사이에 있는 10여 개의 ‘현장’을 방문하면서 이런 역사적 사실을 되돌아보고, 용산공원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강 해설사가 첫째로 안내한 곳은 용산역 광장 한편에 위치한 강제징용 노동자상이다.
“용산역은 군인과 군수물자뿐만 아니라 강제징용됐던 우리 사람들이 군함도 등 징용 현장으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2017년 세워진 노동자상은 깡마른 모습을 한 노동자가 오른손에 곡괭이를 들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가지 못할 고향을 그리는 그의 어깨에는 한 마리 새가 앉아 희망을 잃지 말라고 위로하는 듯하다.
2 백빈건널목 :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자주 등장해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곳. 조선시대 백씨 성을 가진 빈(임금이 후궁에게 내리던 품계)이 궁궐을 나와 살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건널목 주변에 일제가 지은 관사들이 많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그러나 그리운 고국을 떠나야 했던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용산역 광장에서 한강 쪽으로 3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철도회관 안. 그곳에 있는 ‘연복사탑 중창비’는 국운이 다한 나라의 문화재가 겪었을 슬픈 운명을 증언한다.
“중창비는 고려시대 개경에 있던 큰 사찰이었던 연복사의 5층 목탑을 태조 이성계가 1394년 다시 세운 건립 내력을 적은 비석입니다. 연복사가 개성역 근처에 있었던 탓에 중창비가 용산으로 옮겨졌던 것 같은데요. 어쩌면 그 당시 많은 유물과 유적이 철도를 통해 국외로 반출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사람과 유물이 국외로 나가는 사이, 일본인들은 물밀 듯이 용산으로 들어왔다. 강 해설사에 따르면 용산은 명동 등 일본인 거주지로 가는 관문이기도 했거니와, 용산 자체로도 많은 관사를 갖추고 일본인 철도 기술자와 종사자, 그리고 군무원들을 수용했다.
3 용산철도병원: 1928년에 지어진 용산철도병원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 지난해 박물관으로 재단장돼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철도회관을 지나 백빈건널목을 지나면 여전히 남아 있는 당시 관사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관사거리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백빈건널목은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자주 등장해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곳이다. 용산구 이촌로29길 인근을 백빈거리라고 하는 것은 조선시대 백씨 성을 가진 빈(임금이 후궁에게 내리던 품계)이 궁궐을 나와 살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백빈건널목을 바라보면서 왼쪽으로 들어선 골목에서는 ‘친숙하지 않은 기와’를 이고 있는 건물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일본식 기와를 이고 있는 그 건물들은 일본 건설회사가 지은 관사였다. 벽면에 별이 그려진 건물도 눈에 띄었다. 강 해설사는 “저 별이 바로 일본 육군의 상징”이라며 “러일전쟁 당시 120채였던 관사는 1923년 774채로 늘어날 정도로 용산의 중요성은 점점 커졌다”고 말한다.
관사 거리를 둘러본 뒤 한강대로를 건너가니 방탄소년단(BTS)의 소속사인 하이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보랏빛 티를 입은 외국인 소녀들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건물을 찍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 역사 여행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나 200m만 더 걸어가면 옛 용산철도병원이 나타나 다시 역사의 세계로 이끈다.
4 용산기억전시관 : 용산도시기억전시관은 '국제빌딩주변 제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과정에서 발생한 2009년 '용산사고'의 성찰과 교훈의 장소이자 조선시대 용산에서부터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용산에 이르는 도시변천을 담고있는 곳이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지난해 3월 용산역사박물관으로 재탄생한 옛 용산철도병원은 1928년에 지어진 병원이다. 1984년부터 2011년까지는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병원 기능을 이어왔지만, 그 뒤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이에 용산구가 200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곳에 박물관을 세워 기억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디지털로 된 각종 전시물을 본 뒤 용산역사박물관 3층 옥상에 올라가니 바로 옆에 ‘용산철도고등학교’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일본이 용산을 철도의 중심으로 개발하면서 용산역 주변에 철도정비창, 철도원 관사, 철도병원, 철도학교 등이 갖춰졌습니다. 철도병원에서 태어나 철도학교를 다니고 철도 종사원이 되는 시설이 완비된 셈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시설은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철도 관련 업무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기 때문이다. 강 해설사는 “1932년 도쿄 교외에서 히로히토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졌던 이봉창(1900~1932) 열사가 민족의식을 배운 곳이 바로 용산이었다”고 말한다. “1918년 초 용산철도국에 견습공으로 들어간 이 열사는 늦게 들어온 일본인이 더 빨리 승진하거나 월급을 더 많이 받는 것을 보며 민족의식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1919년 4월 견습생직을 그만두게 됩니다.”
5 미군기지 14번 게이트 : 용산기지에 있는 21개 게이트 중 하나. 지난 어린이날 때 용산어린이정원으로 탈바꿈했지만, 미군기지의 오염물질 논란을 강하게 불러왔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이런 철도 관련 시설들은 빠르게 한국의 관리로 넘어왔다. 하지만 일본군이 점령했던 병영은 달랐다.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을 위해 들어온 미군에 의해 다시 ‘점령’됐기 때문이다.
용산역사박물관을 지나 500m쯤 가다가 신용산역 1번 출구와 용산우체국 사잇길로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14번 게이트’는 아직 완전히 반환되지 않은 미군기지를 얼핏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용산 기지에 있는 21개 게이트 중 한 곳인 이곳은 일제 강점기 일본군들이 용산역에서 내린 뒤 병영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일본군 사령부와 총독 관저가 입구에서 보일 정도로 가깝게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 ‘14번 게이트’는 ‘용산어린이정원 정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있다. 지난 5월4일에는 어린이날을 앞두고 현 정부가 부분 반환된 기지의 일부인 14번 게이트 주변을 어린이정원으로 만들어 임시공개했다. 화~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예약제로 운영되는 이곳은 임시개장을 앞두고 ‘환경오염 물질’ 문제가 불거지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미군기지를 공원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완전한 반환뿐만 아니라 반환 뒤 오염물질 정화가 또 다른 큰 과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7 간조 경성지점 사옥 : 용산에 일본인 관사가 늘어나면서 관사 등을 짓는 일본 건축회사도 늘어났다. 간조 경성지점은 용산관사뿐만 아니라 압록강에 있는 수풍발전소까지 건설한 큰 기업이었다. 현재 1920년대에 지어진 모습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용산 한강대로 이야기길’ 코스의 마지막 방문지는 ‘삼각지와 화랑 거리’다. 강 해설사는 “14번 게이트에서 삼각지 사이에는 한때 60곳이 넘는 화랑이 존재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 화랑이 많이 존재했던 것도 미군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한미군이 가족들의 조그만 사진을 큰 그림으로 그려달라는 요청을 많이 함에 따라 한 곳, 두 곳 화랑이 생기기 시작했고 마침내 화랑 밀집 지역이 된 것입니다.”
“한때는 지방에서 트럭을 가지고 차떼기로 그림을 실어가던” 화랑 거리도 이제는 가게가 드문드문 있을 정도로 한산한 거리가 됐다.
8 용광사 터 : 일본식 사찰인 용광사 터가 있었던 곳. 용광사는 경복궁에 있던 융무당과 융문당을 헐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일제의 조선 궁궐 훼철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절이다.현재는 원불교 서울교당이 자리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그 쓸쓸함을 안고 도착한 삼각지에서는 배호의 노래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가 여행객을 맞이했다. ‘삼각지 로터리에~’로 시작되는 ‘돌아가는 삼각지’는 그러나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노래이기도 하다. 배호가 노래를 취입한 1967년에는 한강과 서울역, 그리고 이태원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이 만나 삼각지를 형성했지만, 1974년 삼각지고가도로가 준공되면서 효창공원으로 가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삼각지’에서 ‘사각지’로 변한 것이다.
10 삼각지와 화랑 거리 : 삼각지 화랑거리는 주한미군이 가족들의 조그만 사진을 큰 그림으로 그려달라는 요청을 많이 함에 따라 한때 60여곳이 성업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몇 곳만 남고 사라진 상태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앞으로 용산공원이 완성돼 개방되면 용산은 물론 서울도 큰 변화를 겪을 것이다. 강 해설사의 말대로 여의도(290만㎡)만 한 크기의 용산공원(300만㎡)이 생긴다면 그 파장이 결코 작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 ‘미래의 변화’는 시민들이 꾸는 꿈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 서울시민들은 용산공원에 대해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적어도 ‘용산 한강대로 이야기길’을 해설사와 함께 걸었던 2시간은 그런 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글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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