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종점마을을 가다

아파트 들어 선 정선 그림 속 궁산, 경치는 여전

마곡동 벽산아파트·궁산 아랫마을

등록 : 2017-02-2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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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산 정상에서 본 풍경
겸재 정선의 그림 속 한강과 궁산은 아름답다. ‘뒷개’, 옛 나루에 떠 있는 작은 배는 사라진 지 오래다. 산을 깎아 공장을 만들었다. 공장 터에 아파트가 들어섰고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궁산 북서쪽 기슭 ‘뒷갯말’이 있던 곳에 지금은 강서06 마을버스 종점이 있다.

궁산 기슭 뒷갯말

고구려 시대에 제차파의현, 신라 시대에 공암으로 이르다 고려 시대에 양천현이 됐는데, 조선 시대에도 그 이름을 그대로 이어서 쓴다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 나온다. 그곳이 지금 서울시 강서구 마곡동과 가양동에 걸쳐 있는 궁산 아래 현아를 두었던 양천현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현(현아) 동쪽 11리(약 4㎞)에 양화도가 있고, 서쪽 11리에 김포가 있고, 남쪽 15리(약 6㎞)에 금천이 있으며, 북쪽으로 1리(약 400m)에 한강이 있다. 양천현의 현아는 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239 일대에 있었다.

세종실록에 현의 북쪽에 주산석성(主山石城)이 있다고 나오는데, 그 성이 궁산에 있는 성이다. 현재 궁산 정상에 옛 성터가 있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물리친 권율 장군이 궁산에 있는 성에도 머물렀다고 한다. 행주산성에서 남동쪽으로 약 2.8㎞ 거리에 있는 성이었으니, 행주대첩 당시 이 성의 역할도 중요했으리라 짐작해본다.

강서06 마을버스 종점이 궁산 북서쪽에 있는 마곡동 벽산아파트다. 종점에서 내려 버스 진행 방향으로 더 들어가면 막다른 길이다. 사람은 갈 수 없는데, 그 너머 한강이 있다. 옛날 이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뒷개’라고 했다. 뒷개는 나루였다. 마을 뒤(궁산 넘어 북쪽)에 있었다고 해서 뒷개라고 일렀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자연스럽게 ‘뒷갯말’이 됐다. 뒷개를 한자로 바꿔 쓰면 ‘후포’가 된다.

일제강점기에 후포리와 마곡리를 합쳐 마곡리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금까지 관할 행정구역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지금의 강서구 마곡동이 됐다. 벽산아파트 들머리 부동산업소 벽에 붙은 관내 지번 지도에도 후포라는 지명이 한강 가에 표기됐다. 강서06 마을버스 종점은 마곡동의 북동쪽 끝, 궁산 아래 있다. 마곡동에 속한 자연마을 이름인 ‘뒷갯말’(뒷개)이 강서06 마을버스 종점마을의 옛 이름이다.

궁산 소악루


돌산에서 아파트 단지로

강서06 마을버스 종점인 벽산아파트 정류장 앞은 아파트 단지다. 마을 주민을 만나 마을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 아파트가 완공됐다. 현재 아파트 단지 자리에 화학약품을 만들던 공장이 있었다. 그가 삼십 대에 그 공장에서 일했다. 지금부터 40~50년 전 일이다. 염산과 액체염소 등을 만들었는데 공장에서 사고가 나면서 공장은 문을 닫았다. 그다음에는 전자제품에 관련된 것을 만드는 공장이 들어섰는데 오래가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됐다. 그리고 지금의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산을 깎아 화학약품 공장을 만들 당시에는 궁산 기슭에 집이 많지 않았다. 길도 지금처럼 나 있지 않았다. 지금 마을버스가 오가는 길도 없었다. 새길이 생기고 옛길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그 시절 장마철이면 한강물이 불어 지금의 아파트 단지 상가 앞에 있던 집 마당까지 들어찼다.

궁산의 왼쪽이 마곡동이고 오른쪽이 가양동이다. 마곡동 일대는 논농사를 짓던, 서울에 남아 있는 마지막 평야였다. 가양동도 논이 많았는데, 한강 일대에는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이 일대가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이 반반이었다고 나온다. 벼농사와 함께 조, 기장, 피, 콩, 수수, 팥, 녹두, 메밀 등 다양한 곡물을 재배했다. 삼(마) 농사도 지었는데, 현재 동 이름인 ‘마곡’은 삼(마)이 많이 났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겸재정선미술관
겸재 정선의 5년

종점에서 궁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궁산에서 보는 한강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옛사람들은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놀았다.(지금도 궁산은 근린공원으로 마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조선 시대 영조 때 동복 현감을 지낸 소와 이휴가 지은 소악루는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궁산을 찾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 소악루에 오르면 굽이치는 한강 물길과 함께 안산(서대문구에 있는 산), 인왕산, 남산, 관악산 등이 보였다고 한다. 지금의 소악루는 원래 있던 데가 아닌 자리에 지은 것이다. 또 지형이 바뀌고 도심에 건물이 들어서서 옛 풍경을 그대로 볼 수 없다. 다만 조선 시대 사람 겸재 정선의 그림 속에서나마 궁산과 궁산에서 보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볼 뿐이다.

겸재 정선은 1740년부터 1745년까지 양천 현령을 지냈다. 지금 같으면 경로우대를 받을 나이인 65세에 정선은 현령으로 부임하면서 5년 동안 그림 솜씨를 발휘해 궁산과 한강 등 주변 풍경을 그렸다. ‘안현석봉’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은 정선이 궁산에서 강 건너 안현(지금의 서대문구 안산)에 피어난 봉홧불을 보고 그린 그림이다. ‘소악후월’은 궁산에서 바라본 한강에 달 뜨는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궁산 아래 겸재정선미술관이 있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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