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종점마을을 가다

산비탈에 기댄 지붕에서 고양이가 봄볕에 존다

은평구 앵봉산 자락 종점 마을 세 곳

등록 : 2017-03-23 14:50 수정 : 2017-03-2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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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지붕 위에 고양이가 웅크리고 앉았다.
앵봉산 자락 마을에 봄이 왔다. 지붕 위에서 고양이가 졸고, 산길을 걷는 사람들 걸음이 가볍다. 지난겨울을 이긴 씨앗들은 기어코 푸른 생명을 피워냈다. 은평01 마을버스가 닿는 산 아랫마을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종점마을로 올라오는 은평01 마을버스
북한산 줄기 앵봉산이 품은 마을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에서 남서쪽으로 내달리던 산줄기가 잦아들며 불광동을 품었다. 불광동 서쪽이 갈현동인데, 잦아든 북한산 줄기의 한 축이 불광동 북쪽 박석고개를 지나 갈현동 쪽으로 이어지면서 앵봉산(235m)을 밀어올려 갈현동을 품게 했다.

불광동과 갈현동 사이를 남북으로 지나는 길이 통일로다. 은평01 마을버스는 통일로 변 지하철 연신내역 6번 출구에서 출발해 앵봉산 중턱을 깎아 만든 천일아파트 앞 종점(정류장 이름은 ‘석광사’)까지 오간다.

앵봉산의 ‘앵’은 ‘꾀꼬리 앵(鶯)’자다. 예로부터 꾀꼬리가 많아서 앵봉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 앵봉산 서쪽에 왕과 왕족의 능역인 서오릉이 있다. 조선 시대 임금 숙종, 영조, 정조 등이 서오릉의 능역과 능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며 ‘앵봉(산)’을 언급한 게 실록에 기록됐다.

서오릉은 세조의 아들(추존 덕종)이 묻힌 경릉, 덕종의 아우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인 창릉, 숙종의 비 인경왕후의 익릉,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의 쌍릉 그리고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을 합하여 하나로 이르는 명릉, 영조의 비 정성왕후의 홍릉 등 다섯 기의 능이 있다 하여 서오릉이라고 이르게 됐다. 이 밖에도 서오릉에는 명종의 첫째 아들을 모신 순창원과 파란의 삶을 살았던 여인 장희빈의 묘가 있다.

앵봉산 서쪽은 서오릉이고 동쪽은 갈현동이다. 앵봉산 동쪽 자락에는 은평01 마을버스 종점 말고도 은평03, 은평06번 마을버스 종점이 있다.


은평03 마을버스 종점 마을, 갈현동 12번지 일대.
은평01 마을버스 종점 마을에서 본 풍경. 북한산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옆 마을로 가는 ‘마실길’

은평03 마을버스 종점은 은평01 마을버스 종점 마을(갈현동 285·281 번지 일원)에서 북쪽으로 고개 하나 넘으면 나온다. 은평06 마을버스 종점은 은평01 마을버스 종점 마을 남쪽에 있다. 마을버스 노선 세 개의 종점 마을을 앵봉산이 품고 있는 것이다.

은평01 마을버스 종점에 내려서 마을 구경을 하다 만난 아주머니에게 은평03 마을버스 종점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아주머니는 종점 마을을 ‘12번지’라고 했다. 갈현동 12번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12번지’로 가려면 골목을 지나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는데 고갯길 왼쪽은 산이고 오른쪽은 마을이라고 했다. 산비탈에 들어선 마을의 꼭대기 집들과 산의 경계에 난 길이다. 길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난 길이다. 길이 예뻐서 아주머니도 일이 있으면 일부러 그 길로 다닌다고 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지름길이자 옆 마을로 마실 가는 ‘마실길’이다.

‘마실길’로 걸어 ‘12번지’에 도착했다. 마을 위에 덩그러니 솟은 아파트만 빼면 ‘12번지’는 산의 품에 안긴 고즈넉한 마을이다. 아파트 옆 계단으로 올라가면 앵봉산 능선이다. 능선길을 만나면 왼쪽으로 돌아 걷는다. 마을버스 종점 마을을 품은 앵봉산 능선길을 걷는 것이다. 평일인데도 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산책하는 마을 사람들이다. 대성고등학교로 내려가는 이정표를 따르면 은평06 마을버스 종점 마을이다. 산 아래 높이 솟은 아파트 단지에 산이 무색하다.

천일아파트
텃밭에서 자라난 새봄

대성고등학교 앞에서 길을 물어 은평01 마을버스 종점 마을을 찾아갔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마실길’, 마을 뒤 뒷동산 산길을 따라 세 마을을 한 바퀴 돈 셈이다. 은평01 마을버스 종점인 천일아파트 앞에 다시 섰다. 아파트라기보다 옛날 연립주택에 가까운 건물이다. 1979년에 준공됐으니 40년이 다 돼간다. 세월의 더께가 푸근하게 느껴진다.

천일아파트 앞 골목길을 걸어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왼쪽으로 시야가 트이는데, 북한산 능선이 멋지게 펼쳐진다. 이름은 아파트지만 다세대 빌라 규모의 대양아파트 위 빈터에서 한 아주머니가 겨우내 땅을 덮었던 비닐을 걷고 모종삽으로 흙을 일구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지난가을 김장 배추를 뽑은 자리에 파, 시금치, 부추, 봄동 씨를 심고 그 위에 비닐을 덮어놓았다. 아주머니도 씨앗들도 그렇게 겨울을 지냈다.

걷어낸 비닐 아래 흙에서 푸릇푸릇한 게 돋았다. 엄동 한파를 이겨낸 생명의 씨앗이 새봄에 새 생명을 피워낸 것이다. 생명력 강한 파는 그럴듯한 모양으로 자랐다. 작은 시금치는 여전히 새싹 같았다. 애써서 보아야 눈에 띄는 부추가 옛날 애기들 까까머리를 닮았다. 아줌마는 새 생명을 피우지 못한 봄동을 안타까워했다.

아주머니 텃밭 옆은 다른 사람의 텃밭이다. 지난해 고추가 바싹 마른 채로 남았다. 한쪽 옆에는 마을 할아버지가 가꾸는 텃밭이다. 그곳에는 연탄재가 수두룩하다. 아주머니 말로는 마을에 연탄을 때는 집이 있는데, 할아버지가 그 집에서 나온 연탄재를 가져다 밭에 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연탄재도 거름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봄이 오는 텃밭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재개발 얘기가 나왔다. “십여 년 전부터 재개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직도 멀었다”며 “여기 사는 사람들 중 재개발을 반기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냥 이렇게 사는 걸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재개발하게 되면 넉넉지 않은 형편에 다른 곳으로 쫓겨나야 하는데, 벌써 수십 년 정든 마을, 함께 나이 들고 있는 이곳을 떠나 어디서 또 정 붙이고 살겠냐고 말하며 웃는 아줌마 발치에서 부추가 푸르게 반짝인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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