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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쌤, 심심해요’에서 ‘친구야, 우리 놀자’로 바뀌어”…놀이의 힘
놀 권리에 대한 생각, 그림·글로 표현
놀이 위해 필요한 것 조사하고 정리
용기 내 어른들에게 알리며 ‘뿌듯’
지난 14일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동호 수변 데크에서 송파키움센터 4곳(가락본동·방이1동·장지동·위례동2)의 초등 1~5학년 아동과 돌봄교사 70여 명이 모여 아이들의 놀 권리를 알리는 캠페인을 펼쳤다. 아이들이 놀이에 대한 생각과 자신들의 ‘놀 권리’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그림과 글로 표현한 손팻말을 들고 호숫가를 돌고 있다.
지난 14일 금요일 오후 3시30분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동호 수변 데크. 드넓게 펼쳐진 푸른 호수를 뒤로하고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송파키움센터 4곳(가락본동·방이1동·장지동·위례동2)의 초등 1~5학년 아동과 돌봄교사 70여 명이 모여 아이들의 놀 권리를 알리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었다. 아이들은 바닥에 그려진 사방치기와 달팽이 집에서 편을 나눠 겨루기도 하고, 허리를 뒤로 젖혀 통과하는 림보 게임을 하며 즐거워했다. 캠페인 활동에 앞서 구선영 가락본동 키움센터장이 아이들과 구호를 외쳤다. 구 센터장이 ‘우리는’이라고 하자 아이들이 ‘놀이터 연구원’이라고 입 모아 외쳤다. 곧이어 “우리는 여기 왜 모였나요”라고 묻자 아이들은 ‘놀 권리 알리려고요’ ‘놀이 잘하려고요’ 등의 답을 했다. 키움센터는 방과후·방학 등 틈새 기간에 초등생 아이들을 돌보는 곳이다. ‘쉼과 놀이’를 운영 원칙으로 삼고 서울시와 자치구는 돌봄 현장에서 아동 보호와 아동인권 신장이 이뤄지도록 2020년부터 키움센터에 아동인권전문가(돌봄교사)를 두고 있다. 송파구 4곳(가락본동·위례동·장지동·위례동2)의 키움센터가 손잡고 지난해 놀이터 연구소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며 아동권리 신장을 위한 ‘놀 권리 찾기’ 캠페인을 펼쳤다. 올해는 위례동 대신 방이1동 센터가 참여해 캠페인을 추진했다. 구 센터장은 “올해는 놀 권리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을 그림과 글로 표현해 전시하고, 어른들의 관심과 참여를 끌어내고 싶은 바람을 담아 진행했다”고 했다.
허리를 뒤로 젖혀 통과하는 림보 게임을 하며 아이들이 즐거워한다.
올해 캠페인 준비 활동은 지난 3월 시작됐다. 아이들은 틈틈이 아동의 4대 권리(생존·보호·발달·참여권)와 놀 권리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생각해보고 그림과 글로 표현해봤다. 처음에는 돌봄 선생님과 아이들 모두 어려워했지만, 아이들의 언어로 풀어가면서 재밌게 진행했다. 이현숙 장지동 키움센터장은 “학교 수업을 끝내고 학원을 오가며 들르는 아이가 적잖고, 센터에 머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기간을 길게 두고 유연하게 운영했다”며 “결과물을 미리 정해놓지 않고 아이들 반응에 맞춰 눈덩이를 굴리듯 활동을 키워왔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놀 권리’를 위해 필요한 것도 알아봤다. 시간, 친구, 체력, 기발한 생각, 엄마·아빠 허락, 숙제 완료 등이 꼽혔다. 돌봄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폐박스(골판지)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 손팻말을 만들었다. 캠페인에 쓸 기념품 부채에도 아이들의 그림과 글씨가 담겼다. 구 센터장은 “서로 생각을 보태기도 하고, 고학년 아이들이 동생들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진행했다”며 “아이들은 이런 활동을 하면서 노는 것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고, 자신의 성장에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갔다”고 했다.
행사 전 지나가던 할아버지와 손주가 바닥에 그려진 사방치기 놀이판에서 함께 놀고 있다.
4개 센터 아이들이 만든 손팻말, 전시물, 놀 권리 알리기 활동 모습.
이날 캠페인 행사장에는 아동 기본권과 놀 권리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이 담긴 콜라주 방식의 결과물이 이젤 16개에 전시됐다. 반대쪽 데크에는 놀이를 위해 필요한 것을 적은 글과 그림이 담긴 손팻말 70여 점이 놓여 있었다. 옆에는 석촌호수를 찾은 방문자들이 아이들의 놀 권리를 위해 필요한 것을 리플릿에 적고 네트에 거는 참여 코너가 운영됐다.
아이들은 용기 내 낯선 어른들에게 다가가 자기 생각을 전했다. 박예린(4학년, 방이1동)양이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에게 부채를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우리들의 놀 권리를 지켜주세요”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따뜻한 시선으로 손을 내밀며 “씩씩하게 잘 놀면서 건강하게 자라요,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다음에’라며 아이들이 내민 손을 피하는 어른도 더러 있었다.
두 개 센터의 아이들이 한 팀이 되어 손팻말을 들고 석촌 호숫가를 돌기도 했다. 캠페인에 처음 참여한 민예원(2학년, 장지동)양은 “처음엔 피켓을 들고 걸어갈 때 사람들이 쳐다봐 부끄러웠다”라며 “친구들과 함께해 (자신감이 생겨) 피켓을 높이 들었다”고 했다. 장지후(2학년, 장지동)양은 “날씨가 더워 힘들었지만, 우리 생각을 어른들에게 알릴 수 있어 좋았다”며 “그림을 그리느라 힘들었는데 전시된 것을 보니 뿌듯하다”고 했다.
아동권리와 놀 권리에 대한 전시물 앞에서 조서연(4학년, 위례동2)양의 설명을 들은 주신락(64, 석촌동)씨는 “표현하기 어려운 얘기를 아이가 잘 말해 놀랐다”며 “안전한 공간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커갈 수 있게 어른들이 지지하고 응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을 초등교사라고 밝힌 한 외국인 관광객은 “아이들 활동이 인상적이다”라며 사진을 찍고 한참 지켜봤다.
참여 코너에선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남겼다. 50대 직장인이라고 밝힌 장창록씨는 “아이들이 놀면서 커야 하는데, 잘 안되는 것 같다”며 “어른들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했다. 30대 커플은 “아이들에게 놀 시간을 줘야 한다”고 적었다. 여고생 4명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았던 게 오래오래 좋은 추억으로 기억된다”며 “어른들이 공부만 하라고 하지 말고 놀이도 하라고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 어르신은 “부모들이 각성해야 한다”고 큰소리로 얘기하며 아이들과 돌봄교사들을 격려해주기도 했다.
지난해 캠페인은 놀이터 연구소 프로젝트의 하나로 진행됐다. 놀이터 연구소는 놀이 공간과 놀이를 연구하는 활동을 펼쳤다. 구 센터장은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놀 권리를 말하려면 아이들 스스로 노는 게 뭔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들 입장에서 놀 권리와 놀이를 생각하고 몸으로 해볼 수 있게 진행했다”고 했다. 아이들은 처음에 어떻게 놀아야 할지 쭈뼛거리다가 동네 놀이터에 가서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놀이를 떠올렸다. 여러 놀이터를 찾아 놀아보고 놀이터마다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찾고, 놀이터에서 친구들이 하면 재밌을 놀이를 추천하는 놀이터 지도도 만들었다. 결과물들을 모아 4개 센터 참여 아동들이 함께 캠페인과 보고회를 열었다.
지난해와 올해 ‘놀 권리’ 찾기 활동에 참여한 아이들에게 가장 큰 변화는 자기 주도성을 갖게 된 점이다. 이전엔 ‘심심해요’ ‘뭐해야 해요’라고 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친구야! 우리 놀자’라며 특별한 놀잇감 없이도 재밌게 논다. 센터 문을 열고 “저 학원 몇 시까지 가야 해요” 하던 아이도 이젠 “저 몇 시까지 놀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이 센터장은 “고학년일수록 노는 시간이 짧아 있는 거로 놀고, 저학년들은 놀잇감을 만들며 논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책임과 의무를 알아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문수아(5학년, 가락본동)양은 “놀면서 힘든 일을 잊게 된다”며 “어린이에게 재밌게 놀 수 있는 자유를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문양은 “엄마아빠는 어린이의 놀 권리는 ‘할 일'을 하면서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며 “저도 제 일을 잘하면서 제 놀 권리를 누리고 싶다”고 했다.
돌봄교사들의 생각과 태도에도 변화가 있었다. 아이들이 직접 운영하는 놀이가 프로그램이 될 수 있을까 걱정하던 교사들이 아이들이 주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인다. 구센터장은 “무엇을 할까 등 아이들에게 열린 질문을 더 많이 하고, 자치회에서 아이들 의견을 듣는 것부터 챙긴다”고 했다.
아이들의 놀 권리를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한 리플릿을 보는 참가자들.
센터에서는 아이들의 생각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부모들에게 보여준다. 아이들 변화에 긍정적인 부모도 있고, 부정적인 부모도 있다. 구 센터장은 “아이에게 생각의 근육이 붙은 것 같다며 좋아하는 부모도 있고, 우리 아이만 혼자 놀게 하면 뒤처질 것 같다며 불안해하는 부모들도 있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아이들의 놀 권리를 위해 어른들의 생각과 태도 변화를 강조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있었다. 정은주 용인대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는 “초등 공적 돌봄에서 ‘쉼과 놀이’를 중심에 두지만 정작 현장에선 프로그램 등 무엇인가를 가르치려 할 뿐 아동에게 쉴 시간을, 스스로 놀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는 게 현실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아동이 스스로 쉬고, 놀고, 학습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이를 먼저 인정하고 사고를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라고 했다.
놀이터 연구소 프로젝트는 최근 서울시 키움센터 운영사례 공모전에서 수상했다. 지역의 키움센터가 아동 보호 차원을 넘어 아동 주도로 권리 신장이 이뤄질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평가를 받았다. 서강석 송파구청장은 “더 많은 송파키움센터에서 지역 상황과 아동 욕구에 맞춘 프로젝트들이 진행되도록 필요한 지원에 힘쓰겠다”고 했다.
송파키움센터 4곳의 아동과 돌봄 교사들이 1시간여 동안 ‘놀 권리’ 찾기 캠페인 활동을 한 뒤 기념사진을 찍으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이현숙 선임기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