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바삭·고소한 맛에 후한 인심까지 더해 60년 세월 훌쩍

서울서 가장 오래된 빈대떡집 ‘열차집’ since 1950년대 초

등록 : 2017-06-22 15:35 수정 : 2017-06-2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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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집 2~3대 주인인 아들 윤상건씨와 어머니 우제은씨가 나란히 주방에 섰다.
‘해 질 무렵’이 견디기 어려운 가난한 술꾼들에게 빈대떡집은 만만한 천국이다. 쌈짓돈으로도 술배, 밥배를 불릴 수 있는 곳. 뜻 맞는 동료와 함께라면 빈대떡 한 접시, 막걸리 한 사발로도 회사를,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곳. 돈도, ‘빽’도 필요 없는 주막…. 서울 종로통 옛 피맛골에는 전설처럼 그런 집들이 몇몇 있었다고들 하는데, 그중 하나가 ‘열차집’이다.

열차집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빈대떡집이다. 6·25 전쟁 중인 1950년대 초반에 생겼으니 어언 70년을 바라본다. 4·19가 나던 1960년부터 서울 도심 정비사업으로 피맛골(조선 시대 상민들이 고관대작의 말 행차를 피해 다니면서 생긴 종로 시전 뒷골목길. 현재의 광화문 교보빌딩 뒤편)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2009년까지는 피맛골 초입에서 반세기 가까이 가난한 문인, 기자, 샐러리맨들의 주머니를 털었던 대표적인 서민 술집이다.

이후 열차집은 3대 사장인 윤상건(49)씨 대에 이르러 2010년부터 종로 네거리 제일은행 뒤(공평동)로 자리를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재개발에 떠밀려 갈 곳을 찾다가 옛 피맛골과 분위기가 비슷한 지금의 골목에 터를 잡았다. 상건씨의 어머니 우제은(76)씨는 “새로 생긴 빌딩에 입주하라는 요청을 수없이 받았지만, 빌딩에 갇힌 열차집은 도무지 상상이 안 됐어요” 한다. 이전 후 2년 남짓 동안은 매출이 줄어 고전했지만, 점차 단골손님과 옛 맛을 잊지 못하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회복세로 돌아섰다. “수입이요? 먹고살 만해요. 기업체 부장급은 됩니다.” 그래서일까, 저물녘 골목 어귀에서 솔솔 새어나오는 고소한 빈대떡 냄새가 왠지 아릿하면서도 대견하다.

빈대떡은 막걸리와 더불어 우리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 중국에서 들어온 병자떡의 중국식 발음 ‘빙쟈’가 ‘빈대’떡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성안 부잣집이 성 밖 빈민들에게 구휼 떡을 돌리던 풍습에서 나온 ‘빈자’(貧者)떡이 어원이란 설도 있다. 빈대라는 이름이나 ‘없어 보이는’ 모양새 때문에 어느 틈엔가 부자의 간식에서 빈자의 양식으로 전화되었을 것이다.

열차집의 빈대떡은 옛날부터 특유의 고소하고 바삭한 맛으로 유명했다.(별도 기사 참조) 100% 녹두를 갈아 돼지기름으로 바삭하게 구워낸 고소한 맛과 풍미는 견줄 데가 없다. 자칫 느끼할 수 있는 돼지기름기를 잡아주기 위해 반찬으로 내놓는 조개굴젓(한때는 어리굴젓만 쓰기도 했다) 또한 열차집만의 명물이다. 빈대떡 한점에 조개굴젓을 올려놓고 마시는 막걸리 맛이란! 그 맛을 잊지 못해 시간으로는 50년을 넘고, 거리로는 태평양을 건너는 단골들이 아직도 수두룩하다.

열차집은 시간대별로 찾는 손님들이 다르다고 한다. 해 질 무렵에는 대체로 노·장년층, 퇴근 시간 뒤에는 직장인들, 늦은 밤에는 20~30대 젊은이들이 빈대떡에 소주잔을 기울인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피맛골에서 옮겨온 뒤에는 종로 네거리 주변의 직장인들과 심야의 유흥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새로운 고객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손님층도 시간대별로 다르다. 오후 3~6시는 노·장년층이, 저녁 시간대는 퇴근한 넥타이 부대들이, 심야에는 대학생을 비롯한 20~30대 젊은이들이 돌아가며 십여개의 테이블을 거뜬히 채운다. 일본, 중국, 타이완 등 외국 손님들의 발길도 부쩍 늘었다. 우리와 비슷한 부침개인 오코노미야키를 즐기는 일본인들이 특히 좋아한다.

열차집의 최초 창업자는 경기도 용인에서 서울로 행상을 다니던 안덕인씨 부부였다고 한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안씨 내외는 1950년 9·28 서울 수복 뒤부터 광화문 일대에서 맷돌과 번철을 놓고 빈대떡을 팔다가 1954년 무렵 지금의 종로소방서 부근 옛 중학천변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남의 집 담 밑 양쪽을 판자로 막아 만든 자리가 꼭 피난 시절의 기차간 같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 ‘무허가 주막’을 ‘기차집’이라고 했다. 기차집은 빈대떡 맛과 후한 인심 덕에 금세 명소가 되었다. 1960년께 안씨 부부는 지금의 교보빌딩 뒤 옛 피맛골 어귀로 자리를 옮겨 사업자등록을 할 때 옥호를 열차집으로 바꾼 것이 오늘날 회자되고 있는 열차집의 기원이다.

초창기 피맛골 시대의 열차집은 대체로 술꾼이기 일쑤인 문인, 예술가, 언론인들의 집합소였다. 기자이기도 했던 소설가 최일남은 “요즘은 듣기에도 생소한 ‘가불’을 얻어 매일 밤 열차집의 막걸리와 빈대떡으로 배를 불리던 끝에 맞은 것이 4·19였습니다. 아, 얼마나 감격스러웠습니까?”라는 회고(<한겨레신문> 1989년)를 남겼고, 젊은 시절 허무주의에 빠져 파천황(이전에 아무도 못 한 일을 처음 해냄을 이르는 말)적 기행을 일삼은 시인 고은은 “열차집에 죽치고 앉아 어떤 의미도 내팽개치는 악덕에 잠겨 있던”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의 자신을 자전소설(<경향신문> 1994년 연재) 속에 묘사하고 있다.


1970년대 들어 열차집은 새 주인을 맞이한다. 당시 연로해진 안씨 부부는 근처에서 남편 윤해순(78)씨와 함께 구멍가게를 하고 있던 “착실한” 우제은씨를 적임자로 점찍고 눈여겨보고 있다가 1976년 가게를 넘겨준 것이다. 열차집의 2대 주인이 된 우씨는 안씨 내외로부터 빈대떡과 조개굴젓 만드는 법 등은 물론이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우씨가 기억하는 안씨 부부는 “무던히도 인심 좋고 착한 분들”이었다. 이미 작고한 지 오래인

열차집
안씨 부부의 막내아들은 지금도 가끔 열차집을 찾으며 두 집안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아들에게 열차집을 넘긴 뒤에는 집에서 남편 윤씨를 돌보며 지낸다는 우씨는 “21살 때 시집와 구멍가게를 하다 서른 중반에 귀인을 만나 빈대떡집을 물려받았다. 조금조금 모은 돈으로 집 한채 산 것이 나중에 재산이 되었지만, 애초부터 빈대떡으로 부자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욕심부리지 않고 먹고살면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좋은 집으로 기억되기만을 바랬다. 가게가 피맛골을 떠나고 우리 부부도 일손을 놓았는데, 열차집을 잊지 않고 계속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4~5대를 죽 이어가길 바란다는 기자의 덕담에 우씨는 “그랬으면 좋겠지만 내가 그걸 볼 수 있을까요?”라며 빙그레 웃었다.

외아들 상건씨가 부모님께 본격적으로 가업을 물려받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상건씨는 20대부터 사업 감각을 발휘했다. 1990년대 중반 피맛골 시절 열차집 2층에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피시방 격인 인터넷카페가 들어서 화제를 모았는데 주인이 바로 상건씨였다. 상건씨는 한때 연매출이 1억원대를 돌파하면서 각종 언론매체와 책(<20대에 돈 번 무서운 아이들이 성공한 21가지 이유>, 1998)에 유망한 청년창업가로 소개되기도 했다.

열차집은 2014년 서울시로부터 “보존가치가 있는 빈대떡 전문 식당”으로 인정돼 ‘서울시 미래유산’에 지정됐다. 낙서가 무수한 열차집 벽에도 오래도록 변치 않을 추억의 유산으로 남아주길 바라는 단골의 마음이 새겨져 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변하게 되어 있다. 열차집 빼고^^’.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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