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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흥관 주인 장수훈(60)씨가 가게 안에 세운 진시황 병마용 복제 석상과 나란히 서 있다. 이 석상은 동흥관을 백년이 가도록 잘 지켜달라는 마음에서 중국 시안까지 가서 만들어 왔다고 한다.
1 밀대 하나로 시작한 성공 신화
중국인은 막대기 하나만 있으면 굶어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무슨 먹거리든 만들어내는 재주를 가졌다는 뜻이다.
서울 서남부 외곽의 금천구 시흥동(시흥대로63길)에 의외다 싶을 만큼 크고 오래된 중국집이 하나 있다. 1951년 문을 연 동흥관(東興館)이다. 방 17개에 무려 280석 규모를 자랑하는 이 대형 음식점 문을 처음 연 이는 화교 장연윤(張連崙, 1909~1968)이다. 허리춤에 밀대 하나 꽂고 고향인 중국 산둥성 옌타이를 떠나온 ‘요리기술자’였다. 32살 되던 1941년 열아홉살의 고향 처녀 강미아(姜美娥, 1922~2004)를 데려와 자식 13명을 낳았는데, 5명이 죽어서 8남매를 키웠다. 그중 막내가 지금 동흥관의 주인 장수훈(60)이다.
장연윤은 당시 물가로 밀가루 200포대 값인 만주-조선 월경세 100원을 내지 않으려고 강미아를 열찻간 바닥 밑에 숨겨서 조선에 들어왔다. 부부는 고향 사람들이 많이 살고 옌타이를 오가기 쉬운 인천 부근에 정착한다. 남편은 짜장면을 밀고, 아내는 갓난애 머리통만 한 중국 왕만두 ‘산동빠오즈’(산둥바오쯔)를 빚어 병점거리(경기도 화성시)와 시흥 구시장(현재의 시흥동 목련아파트 자리)에서 팔았다. 10년 고생 끝에 장롱과 항아리에 돈이 가득 쌓이자, 중국집을 내기 딱 좋은 목에 있던 적산가옥(정육점이었다고 한다)을 사들여 간판을 내건다. 이것이 동흥관의 첫출발이다.
장사는 불티나게 잘됐다. 당시 시흥역 일대는 개화기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학교와 신사부터 지을 만큼 이 지역의 중심지였다. 사람과 물류를 타고 각종 상점, 공장들이 들어찼다. 그 한복판에 동흥관이 있었다. 1960년대 대기업이었던 대한전선 직원들이 단골이었고, 뒤이어 들어선 기아산업(현 기아자동차)에는 짜장면을 리어카로 배달할 정도였다. 인근 미군 부대 군인과 군속, ‘양색시’들까지 현찰을 뿌려줬다.
위기도 있었다. 1대 장연윤씨가 갑자기 사망한 뒤 “파리가 날릴 정도로” 손님이 끊어졌다. 그러나 일찍이 독립한 큰형의 지원, 중학교도 마치지 않고 가게에 뛰어든 작은형들, 나중에 동흥관의 ‘장궤’(掌櫃, 사장·지배인이란 뜻으로 화교를 가리키는 비속어 ‘짱께’의 어원)가 된 막내 수훈씨의 근면과 경영 수완, 화교 사회 특유의 신용에 근거한 상호부조-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 어머니 친구가 오로지 신용 하나로 1000만원(현재의 약 1억원)을 빌려줬다고 한다-에 힘입어 어렵사리 위기를 극복했다.
동흥관 홍보대사를 자처하는 차성수 금천구청장(오른쪽)이 주인 장씨와 함께 동흥관 앞에 섰다.
동흥관은 창업 37년 만인 1987년 가게 골목 앞의 53평짜리 미군 바를 사들여 79평의 본점에 이어붙였다. 다시 20년 뒤인 2007년에는 동흥관 옆쪽에 붙은 건물까지 사들여 80평을 또 늘렸다. 1, 2층에 중간층까지 17개의 크고 작은 방들이 다리와 계단으로 미로처럼 얽혀 마치 청나라 기루(기생이 있는 큰 술집)와 비슷한 풍경의 중국집이 완성됐다. 주말이면 280석이 꽉 차고 예약 없이는 미로의 방을 차지하기 어려울 정도다. 배달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근처에 직원 5명이 일하는 배달 전용 분점도 따로 운영한다. 주인 장씨는 인구 23만명의 금천구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개인’이 됐다. 15살 때부터 배달통을 들어 40여년 만에 이룬 성취다 .
동흥관의 성공은 지난 수십년간 낙후와 침체 일로를 걸어온 이 지역 경제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대한전선도 가고, 기아차도 현대로 넘어갔는데, 동흥관만 여전히 성업이군요!” 얼마 전 이곳에서 팔순잔치를 연 전 기아차 고위 임원이 한 말이다. 다 같이 1950년대에 세워져 지역 경제를 굳건히 떠받쳤던 대기업들이 사업 확장으로, 또는 사업 부진으로 떠나버린 뒤 대공장에 의존하던 수많은 중소업체가 따라서 명멸해간 시흥 일대에서 오로지 화교 중국집 동흥관만이 거꾸로 가게를 확장해온 것이 놀랍다는 뜻이다. 2 한 지역이 공유한 추억의 장소 동흥관은 시흥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곳이다. “동흥관은 금천의 랜드마크입니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를 지킨 데는 여기밖에 없지요. 타지에 나간 사람들이 모일 때는 으레 동흥관을 약속 장소로 잡아요. 따로 위치를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인근 시흥초등학교는 역사가 백년이 넘는다. 이 학교 졸업생들이라면 대부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동흥관에 얽힌 추억이라고 한다. “동흥관은 이곳 사람들에게 단순한 ‘짱께집’이 아닙니다. 추억을 공유하고 나누는, 그런 특별한 공간이지요.” 2살 때 아버지 고 차관영 목사(전 시흥교회 원로 목사)를 따라 시흥 판자촌에 들어와 30살이 될 때까지 산 차성수 금천구청장의 회고다. “멱 감으러 안양천을 오갈 때마다 동흥관에서 새나오는 짜장면 냄새에 군침을 흘렸어요. 그걸 한번도 먹어보지 못하다가 초등학교 졸업식 때야 비로소 아버지가 동흥관 짜장면을 사주셨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구나 싶었지요.” 정말 맛은 어떨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으나, ‘동흥관 홍보대사’를 자처하는 차 구청장은 짜장면과 탕수육, 직접 만들어 내놓는 동파육 등을 대표 메뉴로 추천한다. 샤오룽바오도 별미라고 덧붙인다. 동흥관의 오늘을 있게 한 ‘산동빠오즈’는 “추억을 위해” 옛날 방식대로 만든다. 크기는 옛날보다 작아졌지만, 모양과 맛은 가난했던 시절 고향을 떠나 시흥에 정착하거나 거쳐 간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서울 서남부 일대 60여년의 주민 생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동흥관은 2013년 서울시로부터 ‘서울의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대한전선도 가고, 기아차도 현대로 넘어갔는데, 동흥관만 여전히 성업이군요!” 얼마 전 이곳에서 팔순잔치를 연 전 기아차 고위 임원이 한 말이다. 다 같이 1950년대에 세워져 지역 경제를 굳건히 떠받쳤던 대기업들이 사업 확장으로, 또는 사업 부진으로 떠나버린 뒤 대공장에 의존하던 수많은 중소업체가 따라서 명멸해간 시흥 일대에서 오로지 화교 중국집 동흥관만이 거꾸로 가게를 확장해온 것이 놀랍다는 뜻이다. 2 한 지역이 공유한 추억의 장소 동흥관은 시흥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곳이다. “동흥관은 금천의 랜드마크입니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를 지킨 데는 여기밖에 없지요. 타지에 나간 사람들이 모일 때는 으레 동흥관을 약속 장소로 잡아요. 따로 위치를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인근 시흥초등학교는 역사가 백년이 넘는다. 이 학교 졸업생들이라면 대부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동흥관에 얽힌 추억이라고 한다. “동흥관은 이곳 사람들에게 단순한 ‘짱께집’이 아닙니다. 추억을 공유하고 나누는, 그런 특별한 공간이지요.” 2살 때 아버지 고 차관영 목사(전 시흥교회 원로 목사)를 따라 시흥 판자촌에 들어와 30살이 될 때까지 산 차성수 금천구청장의 회고다. “멱 감으러 안양천을 오갈 때마다 동흥관에서 새나오는 짜장면 냄새에 군침을 흘렸어요. 그걸 한번도 먹어보지 못하다가 초등학교 졸업식 때야 비로소 아버지가 동흥관 짜장면을 사주셨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구나 싶었지요.” 정말 맛은 어떨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으나, ‘동흥관 홍보대사’를 자처하는 차 구청장은 짜장면과 탕수육, 직접 만들어 내놓는 동파육 등을 대표 메뉴로 추천한다. 샤오룽바오도 별미라고 덧붙인다. 동흥관의 오늘을 있게 한 ‘산동빠오즈’는 “추억을 위해” 옛날 방식대로 만든다. 크기는 옛날보다 작아졌지만, 모양과 맛은 가난했던 시절 고향을 떠나 시흥에 정착하거나 거쳐 간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서울 서남부 일대 60여년의 주민 생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동흥관은 2013년 서울시로부터 ‘서울의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동흥관은 “산둥 요리 맛을 제대로 내기 위해” 요리사 7명을 모두 현지에서 데려왔다. 올해 안에 2명을 더 채용할 예정이다.
3 1세대 어머니와 2세대 아들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고 6·25로 한반도가 분단되자 산둥성 출신 화교들도 이산가족이 됐다. 40여년이 흘러 중국의 개혁개방이 본격화된 1980년대가 되어서야 ‘비공식’ 고향 방문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19살에 고향 옌타이를 떠나 남편마저 일찍 여윈 뒤엔 친정 식구 만나고 죽는 것이 소원이 된 강미아에게는 천금의 기회였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써서 홍콩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비자를 샀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베이징으로 옌타이 친척들을 죄다 불러모아 한 집당 500달러씩을 쥐여줬답니다. 당시 중국인들에겐 정말 큰돈이었죠. 그 돈을 밑천으로 대부분의 친척들이 경제적 안정을 얻었고, 작은아버지는 큰 부자가 됐습니다.” 1990년대 한중 수교가 이뤄진 뒤에는 해마다 몇번씩 옌타이를 오가며 친척들을 만나는 것이 낙이었던 강미아는 2000년대 초 82살로 타계하기 일주일 전에도 친정 마을에서 친척 손자들에게 용돈을 나눠주고 있었다.
어머니와 달리 시흥에서 태어나 시흥에서만 살고 있는 아들 장씨는 한국이 더 좋다. “대만 사람들은 우리가 대만 국적인데도 한국인 취급하고, 중국에선 아예 우릴 한국 사람이라고 해요. 어딜 가도 이런 현실은 바뀌지 않아요. 수많은 화교들이 미국이나 캐나다로 갔지만 전 한국에서 살 겁니다. 한국도 차별이 많았지만 영주권이 나온 뒤로는 거의 느끼지 못해요.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4 백년을 향하여
금천구 개인 납세자 1위답게 장씨는 지역사회 공헌에도 열심이다. “아버지가 형들에게 늘 그랬어요. ‘공무원과 잘 지내라.’ 생각해보니까 지역사회에 기부도 많이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는 게 그들과 잘 지내는 거더라고요. 일석이조죠.” 차 구청장에 따르면 장씨는 1990년대부터 지역의 각종 단체 회장을 도맡고 있고, 지난 10년간 금천미래장학회 ‘최고 정기 기부자’이다. 명절 때면 보육원 아이들을 불러다 음식을 대접하고 세뱃돈까지 챙겨주는 후덕한 사람이다. 장씨는 예순살이 된 올해 벌써 동흥관 100년을 향한 준비에 들어갔다. “동흥관이 백년 되는 해에 저는 93살입니다. 꼭 살아서 아들, 조카들과 성대한 잔치를 열 겁니다!”
장씨는 최근 중국 시안에서 하나에 300㎏이나 하는 진시황 병마용 복제품 10개를 들여와 동흥관 곳곳에 수호신상으로 세우는 데 열중하고 있다. 동흥관의 부흥을 가져온 ‘좋은 기운’이 다른 데로 새나가지 않게 묵직한 돌로 꽉 눌러놓고, 천하 통일을 이룬 역전의 용사들이 진시황제를 지키듯 동흥관을 지켜달라는 기원이리라.
“앞으로 5년여 뒤면 이 지역은 천지개벽이라고 할 만큼 많이 바뀌어 있을 것”이라는 차 구청장의 말처럼, 금천구 시흥동 일대는 구로디지털단지 등을 배경으로 소비력 있는 고학력 중산층 중심의 도시로 탈바꿈이 예상된다. 이쯤이면 동흥관 주인 장씨가 굳이 멀리 시안까지 가서 무려 총 3톤에 달하는 진시황 병마용 석상을 실어온 까닭을 누군들 짐작하지 못하겠는가?
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