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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혈압과 함께 지구 반 바퀴 “걷기는 선택 아닌 필수”

고혈압 판정 뒤 80개월간 2만㎞ 걸은 이원선씨

등록 : 2017-11-09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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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고혈압 판정받은 뒤

걷기카페 가입해 50대부터 걸어

잘 걸으면 병원 갈 일 없어

개성역 옛역사 토요 걷기가 꿈

이원선씨는 건축사로 일하면서 틈만 나면 걷는 ‘걷기의 달인’이다. 사진은 지난 5일 서울 둘레길 일원 코스에서 이씨와 온라인 카페 ‘걷기마당’ 회원들의 모습. 박수진 제공

‘가을비 한번에 내복 한벌’이라는 말처럼 비 온 뒤 제법 쌀쌀했던 지난 일요일(5일) 낮 12시께. 걷기 관련 온라인 카페 ‘걷기마당’ 회원 23명이 일원역 앞에 모였다. 서울 둘레길을 함께 걷기 위해서다. 30~60대의 다양한 연령대 회원들이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나들이, 청명한, 생키미, 유정…’ 서로 부르는 별명(닉네임)이 재미있다. 단풍이 울긋불긋 물든 가을 산 걷기를 앞둔 이들의 얼굴은 단풍만큼이나 곱다. ‘걷는 사람들은 낯빛부터 다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안내자(길잡이)인 ‘나들이님’ 이원선(61)씨가 일정을 안내한다. “오늘은 서울 둘레길 총 12차 중 11차 걷기입니다. 대모산, 구룡산, 우면산으로 해서 사당역에서 마칩니다. 낙엽길이 미끄러울 수도 있으니 걸을 때 조심하세요”라고 당부의 말을 덧붙인다. 처음 온 회원들에게는 ‘절대 무리하지 말라’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회원들이 ‘걷기의 달인’이라고 할 만큼 걷기를 좋아하는 이씨는 지난해 환갑을 맞았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카페 ‘걷기마당’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벌써 7년차로 80개월째다. 아직 일도 하고 있다. 건축사로, 현재 군부대 공사를 주로 하는 지방건설사의 현장관리를 맡고 있다. 평일에는 일하면서 틈틈이 걷고, 주말에는 걷기마당 회원들과 함께 걷는다. 그동안 그가 걸었던 거리는 2만㎞가 넘는다. 지구 반 바퀴 정도다. 서울의 둘레길은 물론이고 전국의 웬만한 길들에 그의 발자국을 남겼다.


그가 걷기 사랑에 빠진 것도 여느 사람들처럼 건강에 켜진 ‘적신호’ 때문이었다. 2010년께 아내 ‘등쌀’에 종합검진을 했는데 최고혈압이 270으로 내시경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높았다. 바로 입원해서 3일간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원인을 찾지 못했다. 가족력 탓인 걸로 받아들였다. “식구들이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건강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어요.”

시한폭탄인 고혈압을 안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씨는 고민했다. 등산을 시작했는데 숨이 차고 너무 힘들었다. 계속 뒤처지는 바람에 같이 가는 사람들에게 부담도 되었다. 그래서 체력에 맞게 걷자고 마음을 먹었다. 한동안 혼자 걷다가 카페에 가입했다. “여럿이 같이 걸으면 한결 좋겠다는 생각에 온라인 동호회를 찾았어요.”

2008년에 문을 연 ‘걷기마당’은 운영 방식이 민주적이고, 시스템도 체계가 잡혀 있다. 현재 회원은 7000명 정도다. 연령대도 다양하고, 여성이 70%쯤 된다. 10여명의 카페 스태프를 중심으로 주중 야간걷기, 주말 걷기, 여행 걷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날마다 하고 있다. 이들 스태프가 해마다 대표인 매니저를 뽑는다. 이씨도 2015년에 매니저로 활동했다.

온라인 카페 가입 뒤 6개월 만에 이씨도 길잡이로 나섰다. “내가 안내한 길을 함께 걷고 다들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 아주 즐거워요.” 길잡이를 하기 위해서 길 공부도 하고 사전답사를 한다. 미리 가서 걸어보며 코스를 확인하고 주위의 교통편, 식사할 곳, 휴게시설들을 살펴본단다. 답사는 주로 혼자 다니는데, 같은 길이라도 계절마다 다르다고 한다. “제가 안내하는 길은 대개 15~20㎞로 4~5시간 걷는 코스들이죠. 걸을 땐 힘들지만 끝나고 나면 모두 뿌듯해합니다.”

이씨는 자신이 걸었던 길에 대한 이야기와 사진을 카페 게시판에 올린다. 지금까지 2000개쯤 올렸다. 건축일을 하다 보니 사진을 찍을 때 건물을 많이 찍는다. 사찰과 같은 오래된 건물도 찍고 새로 지은 현대식 빌딩도 세밀하게 담아낸다. 테마별로 길을 소개하기도 한다. 단종이 부인과 이별했던 낙산 성곽길은 ‘슬픔을 다스리는 길’이고,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는 성북동 성당, 길상사, 덕수교회를 거쳐 가는 순례 코스를 추천한다.

그는 걸으면서 참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한다. 체력이 나아지는 걸 스스로 느끼게 돼 기분도 좋고, 묵묵히 걷다 보면 생각 정리도 잘 된단다. “걷기는 선택이 아닌 필수예요. 걷기만 열심히 하면 병원 갈 일이 없어요. 서양 속담에 명의가 둘 있는데 하나는 왼발, 다른 하나는 오른발이랍니다.”

그에게 특별한 길이나 걷기 방법은 없다. 길은 걷는 사람들 따라 달라진다. 걷기 방법도 일단 꾸준히 걷는 게 중요하다. “걷다 보면 자세도 발라지고 몸에 균형도 잡혀요. 대신 끈기 있게 걸어야 해요.” 그래서 여럿이 함께 걸으면 더 좋단다.

이씨가 꼭 걷고 싶은 길이 있다. 길잡이 활동을 시작한 초기인 2013년에 이미 공지도 해놓았다. ‘2020년 10월3일 낮 12시 정각 개성역 옛역사 앞에서 토요 걷기.’ 개성역 광장에서 만나 선죽교, 고려박물관, 만월대를 지나 돌아오지 않는 다리, 판문점, 평화공원, 서울역으로 걷는 일정이다. 25㎞ 정도인데, 8시간 정도면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길이란다. “걷기마당 회원들과 이 길 걷는 날을 그리며 제 꿈이 현실로 다가오길 기대한다”며 이씨는 환하게 웃는다.

이현숙 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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