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보다 더 문제인 남편
부모다운 부모 역할 할 사람은 당신뿐
남편에게 단호하되 들어주는 자세
Q군대 간 아들과 고3 딸을 둔 50살 된 전업주부입니다. 남편은 애들이 어릴 때부터 쉴 새 없이 공부하기만 바라는 아빠였습니다. 물론 주말이면 야외에서 같이 놀아주는 자상한 아빠이기도 했습니다. 딸이 중학생이 되면서 친구 집으로 놀러다니기 시작했을 때 한번도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아빠와 딸아이의 갈등 사이에서 전 점점 지쳐갔습니다.
남편은 모든 원인이 우리라고 했습니다. 돈을 벌어다 주면 공부만 하면 되지 뭐가 문제냐며. 딸이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전 너무 무서워서 현관문을 열어주려고 잠도 못 자고 있습니다. 그러다 문 소리에 잠에서 깬 남편은 딸에게 욕설과 함께 난동을 부렸습니다. 제가 말리면 더 소리치면서 막무가내였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지금 딸은 오피스텔에서 혼자 지냅니다. 서로 부딪히지 말아야 조용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주말이면 가끔 딸이 집에 오는데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리치고 화를 냅니다. 그러면 또 부녀지간 싸움이 시작됩니다.
딸보다 남편이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의견은 아예 없습니다. 본인 말이 틀리다고 말하는 순간 화가 치미는가 봅니다. 남편의 성격을 파악한 저는 말해봤자 돌아오는 건 욕설뿐이니 입을 닫아버립니다. 전 딸아이와 남편 성격 때문에 그저 가정이 시끄럽지 않도록 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 같습니다.
다 버리고 나갈까도 자주 생각했지만, 제가 그러면 가정은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가정이 해체되지 않게 노력은 하고 있지만, 남편이 있는 집 안에서는 숨도 쉴 수 없습니다. 남편은 모든 일을 자기 합리화하면서 문제를 전부 우리 탓으로 돌립니다. 우리가 잘하면 폭언도 안 했을 거라고. 경찰에 신고할까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미래를 생각해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끔 화가 난 딸이 톡으로 이혼하라고 저를 괴롭힙니다. 딸은 상처 때문에 자기가 화난 성격으로 변했고 아빠랑 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언젠가부터 딸애가 제 폰으로 아빠의 외도 사실을 알게 돼 부모 노릇도 못한다며 모든 걸 부모 책임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전 두 사람 사이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햇살이 비칠까요? 겨울빛
A자신만 옳다고 믿으면서 강렬한 분노를 폭발시키는 성격은 정말 고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남자라면 더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집니다. 남편이 있으면 숨도 쉴 수 없다는 겨울빛님의 하소연을 이해합니다.
아마 당신의 남편은, 학생으로서 할 일은 오직 공부뿐이라고 믿는 엄격한 아빠인가 봅니다. 그런데 딸아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는 걸 보니 분노한 ‘내면 아이’에 사로잡힌 상태인 것 같네요.
내면 아이가 우리 내면의 미성숙한 측면을 의미한다는 것은 잘 알려졌지요. 때때로 우리는 불안이나 두려움을 과도하게 느끼고, 또 어린아이처럼 의존적으로 변합니다. 당신의 남편처럼 부모의 적절한 태도를 잃어버리고 흥분해서 아이와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겉으로는 부녀간 갈등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아이들의 싸움입니다.
부끄럽지만 저 역시 아이들과 그렇게 싸운 경험이 있습니다. 약이 올라서, 소리치고 상처 주면서 아이를 힘으로 누르려고 하지만 역부족인 그런 상태 말입니다. 내면 아이에 사로잡힌 부모의 특징은 어른다운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어른의 태도는, 아이의 미숙함과 한계를 알아차리고 효과적인 대책을 고민하는 것입니다. 자식 때문에 걱정스럽거나 안타까울 수는 있지만, 자식에게 분한 마음이나 수치심, 억울함 등을 느낀다면 내면 아이가 느끼는 감정일 겁니다.
기세등등하고 철없는 아이들의 싸움은 정말 말리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이어서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겁이 없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싸움에 개입하는 어른은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거친 아이들을 제압할 강단이나 독한 마음이 있거나 잘 달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겠지요.
겨울빛님의 가정에 가장 필요한 존재도 어른다운 어른입니다. 지금 부모다운 부모, 어른다운 어른이 될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가정이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 싸움을 말리는 정도로는 너무 약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지쳐간다는 말씀을 반복하시는데, 사실 당신의 가정이 그렇게 된 절반의 책임은 부모 중 한 사람인 당신에게 있습니다.
가정의 해체를 막으려고, 아이들 미래를 생각해서 참는다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 당신의 가정은 이미 해체되고 있고, 아이들의 미래도 이대로라면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겨울빛님, 남편이 폭력적인데다 외도 사실까지 있다면 경찰을 부르고 이혼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아내로서 그런 용기를 갖지 못할 때 딸은 엄마에게 실망해 당신을 조롱할 것입니다. 남편이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이혼하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해야 남편이 당신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입니다. 단호해지기 위해서 당신 안에 있는 분노의 힘을 불러내도 됩니다. 그동안 남편과 딸의 폭력적인 태도에 당신도 화가 많이 났을 테니까요.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남편의 그 원론적인 주장 너머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이나 불안, 좌절을 이해해보세요. 그는 왜 그토록 절실할까요? 가정 안에서 따돌림당하고 있는 남편의 피해의식도 생각해주세요. 가족의 사랑을 받았다면 남편도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당신의 역할이 힘에 부쳐서 두려울 겁니다. 초인적인 힘을 내야 하니까요. 그렇더라도 이번 기회에,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과감히 벗어던지는 경험을 해보세요. 한 가정의 제대로 된 어른이 돼보세요. 분란 속에서 엄마가 당찬 어른이 되는 경험, 당신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정말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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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라ㅣ마음칼럼니스트·<천만번 괜찮아><치유하는 글쓰기> 저자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