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주인 되기

수평적 관계맺기, 설득과 인내의 과정

프리랜서 선언 뒤 허둥대는 40대 전업 맘에게

등록 : 2017-12-1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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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한 뒤 일과 가정 뒤죽박죽 느낌

나를 대표하는 얼굴 무엇인지 고민

자신의 페르소나는 다양한 모습

종합체로서의 얼굴이 진정한 자기

아무리 무색무취한 사람들이라도 시청 앞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서면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기업들이 한 해의 실적을 점검하고 직원들의 고과를 평가하는 것처럼 개인들도 자기 자신을 결산하는 시즌입니다. 무릇 결산이란 작업이 그렇듯 자산보다는 부채 부분에 눈길이 더 가게 마련이지요. 도전 정신에 대한 칭찬보다 이루지 못한 것에 자책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자신에게 가혹한 평가를 할 때도 있습니다. 워킹맘으로 살고 있는 40대 직장여성 A씨도 그중 한명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소홀한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에 1년 전 퇴직하고 자유직업을 택했지요. 일과 가정의 균형이 이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뒤죽박죽입니다. 회사 다닐 때는 제 업무만 하면 됐지만,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하니 우왕좌왕 바쁘기만 합니다. 이전에는 제법 능력 있는 직장인이란 평가도 들었던 제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당황스럽습니다. 부모님에게는 멋진 딸 노릇을 해야 하고, 집에서는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든든한 엄마가 되고 싶은데, 실상은 모든 게 그렇지 못하네요. 나를 대표하는 얼굴은 무엇일까 자문해보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새로이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힘에 부친다는 느낌이 듭니다. 완전히 후퇴한 한 해가 아닐까 마음이 착잡합니다.”

그녀의 고민을 듣다 보니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연극배우가 쓰는 ‘가면’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하는데, 현대사회에서는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합니다. 인생이라는 연극을 하는 배우로서의 개인을 말합니다.


우리는 몇 개의 얼굴을 갖고 살아갈까요? 연극마다 다른 배역을 떠맡듯이 인생의 다양한 역할을 경험합니다. 딸로서, 부인으로서, 엄마로서, 직업인으로서 배역에 충실하다보니 보여줘야 할 얼굴도 제각각입니다. 여러 역할에 충실하다 보면 힘에 부치기도 하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과연 나의 페르소나는 어떻게 비쳤을까, 저도 잠시 자문해봅니다. 저는 ‘글로생활자’입니다. 글로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고 책을 쓰면서 살다보니 가족들 눈에 비친 제 모습은 책상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 끙끙거리며 자판을 두드리는 모습일 겁니다. 글로 벌서고 있는 ‘글로벌’ 페르소나라고 할까요?

이곳저곳 강연장에 초대되어 무대 위에도 서야 합니다. 100분 동안 청중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몰입의 기술과 목소리 변화도 필요합니다. 입으로 노동을 하기에, 입 ‘구’(口) 자를 써서 ‘구로동’ 사람이라는 농담도 듣습니다. 동영상 강연 녹화를 위해 카메라 앞에 섰을 때는 또 다른 표정을 짓습니다. 연기자로서의 페르소나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공공기관에 나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집단과 개인의 중재를 담당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정장 차림의 엄숙한 페르소나입니다. 반면 어머니가 장기 입원 중인 병원에 가면 가끔 노모 앞에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애교도 부려야 합니다. 학창 시절 오랜 친구들과 만나면 여전히 유치한 농담으로 낄낄댑니다. 그러다가도 두 아이 앞에서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혹은 탱크처럼 굳건한 모습으로 비쳐야 합니다. 이번에는 가장의 페르소나인 셈이지요.

저도 가끔은 스스로 묻습니다. 이 가운데 과연 어떤 얼굴이 나의 진정한 페르소나일까? 나는 남들에게 어떤 페르소나로 비치길 원하는 것일까? 미국 소설가 토니 모리슨이 <뉴요커>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당신이 하는 일이 곧 당신입니다.”(The Work You Do, The Person You are)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그의 말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일은 곧 그 사람입니다. 일이 풀리지 않으면 다른 것들에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고민을 털어놓은 분은 자기의 일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인 듯싶고, 그러다보니 과도기적 어려움을 겪는 것 같습니다. 일을 사랑하는 페르소나로서의 숙명 같은 것이지요.

직장인으로서의 얼굴과 프리랜서로서의 얼굴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직장생활에서는 대부분 버티컬(수직의, 세로의)한 생존법을 익힙니다. 상하 관계, 명령과 보고의 체제로 수직적으로 일하는 방식입니다. 한국 사회는 늘 서열을 따집니다. 학교, 군대, 직장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 만나면 제일 먼저 나이부터 따집니다. 그게 질서입니다.

반면에 조직에서 독립하면 수평적 관계로 일해야 합니다. 서열이 아니라 연계와 협력이 중요합니다. 생각과 스타일이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의견이 다를 때 수직적 관계에서는 보고와 지시로 결정이 이뤄지지만, 수평적 관계에서는 설득과 인내가 중요합니다. 수평적 페르소나로서 연습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을 단 하나의 얼굴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내면에 숨겨진 상이한 속성들이 협력할 때 배우로서의 멋진 페르소나가 완성되는 게 아닐까요? 그 모든 것의 종합체로서의 얼굴이 진정한 페르소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독한 자기검열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적절한 자기반성은 필요하지만, 과도한 자기비하는 금물입니다. 후회는 습관 같은 것으로 마음의 근육을 상하게 합니다. 당신의 진정한 페르소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 잊지 마세요!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ㅣ저서 <투아레그 직장인 학교> 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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