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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끝자락서 만나는 기분 좋은 공공 조형물

‘윤슬: 서울을 비추는 만리동’

등록 : 2018-01-25 14:24 수정 : 2018-01-2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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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달빛에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예쁜 우리말 이름의 조형물

윤슬 이후 도시 공간 규모와 성격

고려한 공공 예술 기획한다니 반가워

윤슬 전경

남대문에서 서쪽을 보고 ‘서울로 7017’를 따라 슬슬 걷다보면 서울역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만리동으로 내려가는 끝자락에서 신기한 물건을 만난다. 멀리서 내려다보면 번쩍이는 태양광 판인가 싶던 그것은, 가까이 서야 도심에 마련된 공공 조형물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윤슬: 서울을 비추는 만리동’이다.

반사광이 서로 간섭하며 너울거림이 장관


윤슬, 햇빛 달빛에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니…. 참으로 예쁜 우리말 이름이다. 어이없고 덜떨어진 외국어 이름들 판치고, 마구 줄여 당최 원래 뜻을 알기 힘든 이름투성이인 서울에서, 새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걷다 그 끝에서 만나는 반짝이는 윤슬이라니…. 기분 좋은 만남이다.

돌 타일로 덮인 제법 널찍한 삼각형 대지 가운데, 25m 지름으로 원을 그려서, 옴팍하게 둘러싸며 속을 파 4m를 내려갔다. 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개별적으로 흩어진 자잘한 돌계단들이 아래의 둥근 마당을 향해 도미노 쓰러지듯 흘러내린다. 얇은 판을 다양한 높이로 쌓아 만든 정방형(정사각형) 돌계단들이 돌아가며 물결치니, 보기가 좋다.

지상엔 스테인리스스틸 판으로 된 장방형(직사각형) 단면의 긴 막대기로 원형 구멍 위에 촘촘히 줄을 세워 천장을 걸었다. 멀리서 보고 태양광 판인가 했던 빛나는 판이 이것이었다. 거울 같은 표면은 주변을 비춰낸다. 그러나 거울의 평활도를 지니지 못한 금속판은 주변의 모든 것을 왜곡되게 투영한다. 반듯한 주변 건물들을 맘대로 일그러진 자연처럼 표현하니, 재미나다.

이 금속 루버들은 주변 환경을 비춰주기도 하지만, 더 큰 목적은 빛을 반사해 오목한 내부로 빛의 물결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반사광이 서로 간섭을 일으키며 계단과 바닥을 타고 너울거리는 모습은 장관이다.

지상 스테인리스스틸 판

대중과 소통능력 부족한 공공 조형물

요즘 서울에 지어지는 건물이건 공공 조형물이건 작가의 설명 없이 그냥 작품만 보고는 무슨 생각으로 그걸 만들었는지 알기 힘든 물건들이 부지기수다. 윤슬과 함께 ‘서울로 7017’에 기대어두었던 ‘슈즈트리’라는 설치미술품은 세상에 다시 못 들을 온갖 욕을 먹다 보름도 못 버티고 사라졌다. 멀리서 보면 폭포처럼 보인다는 관계자의 설명에 콧방귀가 나온다.

작가가 의도한 예술작품으로서의 의미는 분명히 읽히지만, 문제는 공공 조형물로서 대중들과의 소통능력이었다. 말 그대로 공공의 재원으로 마련하는 공공 조형물이니 작품도 좋지만 공공성을, 대중이 받아들일 메시지를 제일 먼저 생각하는 배려가 부족했다.

온갖 지자체들이 돈을 들여 마을을 꾸민다, 도시를 아름답게 만든다 하며 벽화를 그리고 조형물을 세워대니, 황송할 지경이다. 그러나 벽화 보겠다고 집 앞에 진을 치는 구경꾼으로 마을 주민들 일상이 망가지는 경우도, 광화문 한복판에서 추운 날 좌판 펴고 관광객들 사진 모델 해주는 세종대왕도 참 딱하다. 이 모두 공공 예술이라면서도 공공성이 결여된, 예술이 아닌 다른 목적을 바라본, 혹은 누군가의 덜 익은 아이디어를 밀어붙인 덕이다.

문화예술진흥법, 공공 예술 활성화 기여 넘어 역기능도

미술관에서나 보던 작품들이 공공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도시의 한복판에 뛰어든 건 불과 수십 년 전이다. 예술이란 것이 자유로운 정신적 표현이기는 하지만 자산가나 종교의 지원이 있어야만 창작 기회를 얻을 수 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다 시민사회가 발전하면서 공공에게 문화적 기회를 넓혀주려는 의도로, 말 그대로 공공장소에 예술품을 가져다놓는 것으로 시작했다. 공공 예술의 양을 획기적으로 늘린 사회적 변화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1970년대 초에 제정된 문화예술진흥법과 1986, 88년도의 국제 경기 유치일 것이다. 88올림픽 때 무더기로 제작되어 사회 곳곳에 뿌려진 예술품들은 지금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국가가 총대를 메고 문화예술로 충만한 나라의 이미지를 급조했던 것이다.

돌계단

문화예술진흥법에는 일정 연면적이 넘는 건물의 신축 때 건설비의 1%를 건축물 미술 장식에 써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이 제도는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기회를 제공하고 도시의 모퉁이마다 예술품 하나쯤은 놓여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순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거의 시각적 공해나 다름없는 일부 작품들과 관련 비리는 순수한 예술가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제도는 수많은 논의와 개정을 거치며 내용은 더 복잡해지고 금액은 다소 감해졌지만 여전히 시행 중이다. 여러분도 자신의 아파트 단지나 직장 부근에서 이해 못 할 조형물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 자신도 미술품 장식 심의에 참여한 적이 있지만, 심의 대상 작품 중에는 놀라울 만치 유치한 것도 있어 입을 다물지 못하기도 했다. 더 괴로운 것은 그 엉망진창인 작품 중 일부는 심의를 통과하고 실제로 설치된다는 것이다. 작품성 떨어지는 것은 그냥 못 본 채 꾹 참으면 된다지만 보행에 위험하거나 노약자가 다칠 만한 형상이나 재료를 사용한 작품이 버젓이 놓인 것은 거의 공공에 대한 범죄에 가깝다. 공공 재원으로 공공에 해를 끼치는 건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봄여름 아니면 쓰지도 못할 비위생적이고 관리비만 잡아먹는 분수는 또 왜 그리도 많은지….

어설픈 공공 예술 대신 숲이나 쉼터 짓기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지어지기 전이나 후나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닌다. 건축가들에게 일거리 생기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서울에 그런 땅이 나오면 제발 문화나 예술 좀 그만 들먹이고 그냥 우거진 숲이나 쉼터 만들었으면 싶다고. 생태적 어바니즘(도시주의)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어차피 심의로나 법으로는 질적 규제가 불가능한 공공 예술품 대신, 어디 적당한 빈 땅에 공원 같은 녹지를 궁리하는 것이 시민들을 위해서 훨씬 나은 선택이지 않을까? 질 낮은 공공 예술 양산하는 공장들 먹여 살리려거든 차라리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작업할 공간이나 제공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눈 내린다고 닫힌 윤설의 유리문

윤슬을 찾아간 날 함박눈이 내렸다. 눈으로 덮인 ‘서울로 7017’은 온통 띠를 둘러 사용금지, 접근금지였다. 이미 나무도 여러 그루 자취를 감췄고 가게들도 몇은 문을 닫았다. 썰렁한데다 위험하기까지 했다. 혀를 차며 내려와 만난 윤슬도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눈이 내린 윤슬을 볼 들뜬 마음은 차갑게 닫힌 유리문에 거절당했다. 내부 계단과 바닥 결빙으로 인한 안전 문제로 출입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윤슬 내부

이럴 땐 차라리 못난 도시 조형물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공시설이라 해서 찾아갔다 거절당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공공시설은 그것이 어린이 놀이터건 광장이건 공공 예술품이건 시민의 사용을 고려해야 한다. 계단은 너무 잘게 쪼개지고 높이도 제각각이며 넘치는 모서리는 위험하다. 눈 내리고 비 오는 날은 훨씬 더하다. 예술적 의도는 이해하지만 좋은 의도라고 위험까지 덮진 못한다.

윤슬은 주변을 고려했고, 아름다운 구성은 화이불치(華而不侈·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다. 개념은 명확하고, 그 개념을 표현하는 구성 요소들은 조화를 이룬다. 시민들이 모이고 만지고 느끼는 공공성까지 충분하다. 하지만 예술적 공공성은 얻었으되 기능적 공공성은 여전히 아쉽다.

서울시는 윤슬 이후에도, 도시 공간의 규모와 성격을 고려한 예술작품이나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있다니 반가운 얘기다. 미술관에 있어야 할 물건 꺼내다 한길 가에 내어놓거나, 지나는 거리에 뜬금없이 널브러진 예술가 혼자 좋아할 물건이 아닌, 공공성 있는 장소를 고르고 거기에 딱 맞는, 시민들이 즐기고 쉴 수 있는 물건들 더 많이 생기길 바란다.

글·사진 안준석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 l 건축가(AIA)·공학박사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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