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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기념하자고? 명칭 유감
입구의 직선축, 전체주의적 장엄 연상
도심 속 시민들 휴식 공간은 될 수 없나
전쟁기념관 정면
전쟁은 참혹하고, 전쟁을 벌이는 인간은 반성을 모르는 슬픈 동물이다.
살이 찢어지는 혹독한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성 위에서 전쟁의 공포를 견디던 영화 <남한산성>(2017, 황동혁 감독)의 군졸들과 백성들은, 아무런 곡절도 모른 채 삶과 죽음의 경계에 던져진 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철없던 시절, 맛난 음식 풍족한 명절이 오면 동네 아이들은 모두 신이 났지만, 친구 하나만 우울했다. 그의 아버님은 열댓 나이에 친척 집 다니러 오셨다가 6·25로 졸창간에 홀로 남쪽에 남겨진 이북분이셨다. 말로 다 못할 고생 끝에 가족을 이루었지만, 설이나 추석이란 것이 그 아버지에게는 물 한 모금 삼키기 힘든 통한의 시간일 뿐이었고, 친구의 가족에게는 어두운 침묵만 흐르는 슬픈 날일 뿐이었다. 전쟁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관련된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전쟁기념관이란 용어의 애매함 우리에겐 그 슬픈 역사를 기념하는 전쟁기념관이 있다. 육군본부가 있던 자리에, 1989년 말 현상 설계에서 당선된 설계안으로 1993년에 지었으니, 벌써 나이가 스무 해를 훌쩍 넘겼다. 전쟁기념관의 웹사이트를 찾아가보면 ‘자주 찾는 질문’(FAQ)의 하나로 “전쟁기념관이라는 이름이 정해진 이유는 무엇인가요?”를 선정하고 이에 대한 답을 마련해두었다. 아마도 전쟁기념관이라는 이름을 마뜩잖아 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닌 듯하다. 거기에 올린 장황한 답을 줄이면 ‘참혹한 전쟁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고, 역사로서의 전쟁을 기억하도록 국민을 교육해, 참혹한 전쟁 방지 공감대 형성이 목적’이라 한다. 이 세상의 어떤 전쟁을 국민이 일으켰나? 전쟁 방지를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니…. 또한 수고롭게도 ‘전쟁기념관’ 명칭의 당위성을 위해, 1988년부터 2010년 동안 여론조사를 여섯 번이나 했고 모든 조사에서 절대다수가 찬성했으며, 영어로 ‘워 메모리얼’(War Memorial)이니 보편적 용어란다.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 치기도 그렇지만 맞다며 손뼉 치기는 더욱 애매하다.
전쟁기념관이란 용어의 애매함 우리에겐 그 슬픈 역사를 기념하는 전쟁기념관이 있다. 육군본부가 있던 자리에, 1989년 말 현상 설계에서 당선된 설계안으로 1993년에 지었으니, 벌써 나이가 스무 해를 훌쩍 넘겼다. 전쟁기념관의 웹사이트를 찾아가보면 ‘자주 찾는 질문’(FAQ)의 하나로 “전쟁기념관이라는 이름이 정해진 이유는 무엇인가요?”를 선정하고 이에 대한 답을 마련해두었다. 아마도 전쟁기념관이라는 이름을 마뜩잖아 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닌 듯하다. 거기에 올린 장황한 답을 줄이면 ‘참혹한 전쟁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고, 역사로서의 전쟁을 기억하도록 국민을 교육해, 참혹한 전쟁 방지 공감대 형성이 목적’이라 한다. 이 세상의 어떤 전쟁을 국민이 일으켰나? 전쟁 방지를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니…. 또한 수고롭게도 ‘전쟁기념관’ 명칭의 당위성을 위해, 1988년부터 2010년 동안 여론조사를 여섯 번이나 했고 모든 조사에서 절대다수가 찬성했으며, 영어로 ‘워 메모리얼’(War Memorial)이니 보편적 용어란다.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 치기도 그렇지만 맞다며 손뼉 치기는 더욱 애매하다.
6·25전쟁 50주년 기념조형물
‘기념’은 편향성 없는 단어라 좋은 일에도 궂은일에도 쓴다. 하지만 결혼기념일, 창사기념일처럼 보통 즐거운 일에 더 자주 쓰이는 경향을 보이니 전쟁기념관이라는 이름은 다른 의미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다. 분홍색이나 보라색에 명확히 규정된 감성적 정의는 없다 해도, 이 색깔에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은 있다. 그러니 분홍 양복에 보라 넥타이 매고 장례식장 간다면 제정신이냐는 소리 들을 건 뻔한 일이다. 메모리얼을 기념관이 아닌 추모관으로 번역하면 안 되는 이유는 또 뭔가? 괜한 오해 없으려면 매번 밝힌 여론조사 참가 인원처럼 절대다수라는 찬성 인원수도 밝히는 것이 더 깔끔하지 않을까?
규모만으로 장엄함을 유지하기 어려워
그리스 신전이나 천안문처럼 사람 주눅 들게 하는 장엄함을 만들려면 엄청난 규모가 제일이다. 하지만 규모만으로 장엄함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처음에는 전체를 보고 크기에 놀라지만 접근하면 시야에서 벗어나고, 안으로 진입하며 환경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건축 구성요소들의 디테일과 공간의 조화로운 합창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내부 공간 여행의 긴장감을 조여야 한다.
전쟁기념관은 그 넓은 부지 어디에서도 한눈에 넣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다. 칼 모양 조형물의 까마득한 높이도, 그 뒤에 펼쳐지는 해자와 광장의 넓이도, 광장을 둘러싼 건물 크기도, 높은 천장으로 만드는 어두운 내부 공간의 깊이도, 일단 크기로는 방문자를 압도한다. 심지어는 내부의 돔에 그려진 천장 그림은 폰카메라로는 담기도 힘들고 그림에 올려진 작가의 서명마저 특대 사이즈다. 아픈 역사의 교육을 위해선 넘치는 구성이다.
천창과 천장화 ‘동시성’
입구에서 시작해 건물 내부까지 꿰뚫는 강력한 직선 축이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그 축을 중심으로 엄격한 좌우대칭에 열주로 이어지는 회랑과 중앙의 돔은 전체주의적 위엄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허우대만 멀쩡한 덩치는 장엄함을 유지하기에는 빈틈투성이고, 규모가 건사해야 할 긴장감은 그 빈틈으로 스멀스멀 새어나간다. 마치 티브이에서 본 요리를 떠올리며 만든 음식같이, 열주와 천창과 돔과 석재 등 각각이 낼 수 있는 효과를 상상하며 온갖 재료를 이것저것 넣고 끓여낸 것 같다. 양은 많아 푸짐하긴 한데 네 맛도 내 맛도 없이 서늘하기만 하다.
전사자 명비가 놓인 회랑
워싱턴기념비나 오클라호마 메모리얼을 보라
사실 건축적인 긴장감이나 감동은 차후의 문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글을 시작하며 명칭으로 시비를 걸었던 이 건물의 목적이다. 설계자는 전쟁의 아픔을 체험하게 하고 나라를 지키고 떠나신 분들을 추모하는 목적 외에, 아름답고 편안한 휴식이 있는 시민공원을 제공하고 싶었던 듯하다. 추모와 아픔의 장소라고 휴식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월남전의 희생을 추모하는 워싱턴의 기념비나 테러 피해자를 기리는 ‘오클라호마시티 내셔널 메모리얼 뮤지엄’은 시민들이 쉴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의 조용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부지의 대부분을 시민들이 걸으며 사색을 향유하는 공간으로 구성했기 때문이고, 망자와의 개별적 접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기념관에는 선열의 흔적을 어루만질 개별적 접촉과 사색의 여유가 부족하다. 그 대신 탱크와 미사일에 입체영화의 4D 체험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전쟁기념관의 운영진은 이 건물을 ‘서울 도심 속 문화와 휴식의 공간’이라 말한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다가서는 노력은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렇지 않아도 가슴 아픈 역사와 오락적 요소의 결합이 불편한데, 내부는 비극으로 가득한 전쟁 추모시설에 가깝지만, 외부는 결전과 승리를 다짐하는 듯 온갖 무기로 가득하다. 더 이상한 것은 전쟁기념관에 바짝 붙여 지은 웨딩홀과 식당, 카페, 편의점 등 각종 위락시설이다. 새 인생 출발하는 신혼부부는 축복받아야 하고, 장난감 사며 과자 먹고 떠드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나쁠 수는 없지만 순국선열 모신 엄숙한 자리에 끼어들긴 힘든 조합이다. 어찌 이리 무거운 자리에 지극히 일상적인 시설들을 함께 버무릴 생각을 했는지 그 무심함이 놀랍다. 오늘도 전쟁기념관은 다빈치의 천재성 전시가 한창이고 각종 시설의 임대 활동에 열심이다.
명쾌한 목적과 세심한 디테일 부족
전쟁기념관을 구성하는 공간들은 하나같이 명쾌한 목적이나 세심한 디테일이 부족해 보인다.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느낌을 줄 것인지 오랜 시간 계획하고 수없는 도상훈련을 거쳐 완성됐다고 보기에는 크기만 하지 영 허술해 보이는데, 추모도 하고 역사교육도 하고 즐거움도 주고 영업도 하면서 시민의 휴식처까지 되려 한다.
전쟁기념관은 처음부터 큰 땅 다 차지하고 자랑하듯 지을 일이 아니었다. 고인 기리고 슬픔 다독이며 편하게 앉아 있다 올 소박한 공간이 필요했고, 시민들 마음 와닿는 곳에 조용히 옷깃 여밀 자리를 잡았어야 했다. 연병장 같은 터무니없는 광장은 그나마 녹색 공간으로 리모델링 중이라니 다행이지만, 교육시설도 전시시설도 시민의 위락을 위한 공간들도 모두 추모공간과의 적절한 분리와 치밀하게 계획된 감동 있는 엮임과 과정이 필요했다.
비록 긴 시간이 흘렀지만 전쟁의 아픔은 누구에겐 여전히 살아 있는 고통이다. 어찌 감히 전쟁을 기념하겠는가? 또한 누가 감히 이들의 아픔을 볼모로, 저만의 정의로 정쟁을 벌이는가? 제발 부산하게 먼지 피우지 말고, 전쟁의 희생 앞에 겸허히 무릎 꿇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참회하자. 개인의 생명보다 더 큰 우주는 없으니, 다시는 허튼 허울 앞세워 눈물 삼키는 일 없게 하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하자.
글·사진 안준석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ㅣ건축가(AIA)·공학박사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