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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희망, 다른 은둔형 외톨이들과 나누고 싶어요”

등록 : 2020-08-27 15:42 수정 : 2021-01-2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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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유승규씨 5년 넘게 은둔, ‘K2’에서 공동생활하며 회복 중

성북구, 시 청년자율예산으로 ‘고립 청년 돕기’ 4개 사업 운영

13일 성북구 성북청년공간에서 ‘은둔고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참여자 10여 명은 은둔을 경험했거나 은둔형 외톨이에 관심 있는 20~30대들이다. 이들은 교육받은 뒤 다른 외톨이들의 가정 방문 상담사로 활동한다. 고립 청년 자립 지원 기관인 K2인터내셔널코리아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은둔 경험에서 회복하고 있는 유승규씨가 이 프로그램을 기획해 운영하고 있다.

코로나로 은둔형 외톨이 증가 예상…다양한 ‘맞춤정책’ 시급

은둔 몇년 이어지면 뇌 활동 저하 우려

성북, 요리·영화·미술 여러 방식 활용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디딤돌 되길 희망”


‘은둔 시작, 극복과 좌절, 입대·제대, 대학 생활, 휴학, 일·관계·꿈 회복 중’ 유승규(27)씨의 인생 그래프(사진)에 적힌 변곡점들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 최저점을 마이너스 100점 밑에 찍었다. 18~23살의 넓은 골과 25~26살의 좁은 골, 두 개의 골짜기가 그려졌다. 마치 넓이 차이가 큰 비대칭의 긴 다리 같다. 마이너스 100 아래 푹 파인 골짜기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슬픈 그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13일 오후 성북구 화랑로 성북청년공간에서 은둔고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유씨의 얼굴은 밝았다. 이 프로그램은 서울시 청년 자율예산으로 추진하는 성북의 사회적 사각지대 청년 지원 사업 4개 가운데 하나다. 고립 청년의 자립을 돕는 사회적기업 K2인터내셔널코리아(K2)가 주관한다. 은둔 경험이 있거나 은둔형 외톨이에게 관심이 있는 청년들이 약 5개월의 교육 과정을 거쳐 (은둔고수가 되어) 고립 청년 대상 가정 방문 상담을 한다.

이날은 두 번째 시간으로 참여자 10명은 각자의 은둔 경험을 나눴다. 두 팀으로 나눠 ‘나의 가장 슬픈 순간을 기록하자’는 주제로 각자 인생 그래프를 그렸다. 팀별 공유 활동에 앞서 유씨가 자신의 인생 그래프를 참여자에게 보여주며 은둔 경험을 털어놓았다.

유씨는 “꿈이 좌절되면서 은둔하게 됐다”고 했다. 청소년기 그는 게임 크리에이터를 꿈꿨다. 하지만 가족은 물론 친구들조차도 그의 꿈을 무시했다. ‘세상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마음의 상처가 곪아갔다.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버지는 홀로 오랫동안 외국에서 공부하며 자수성가해, 아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서먹했던 부자 관계는 더 나빠졌다. 식구들과 말도 섞지 않으려 밤에만 방 밖으로 나왔다.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져 우울해졌다. 근력도 떨어지는 등 마음과 몸 건강이 나빠졌다. 잠깐 밖으로 나왔다가도 또다시 은둔, 그렇게 5년을 보냈다.

군대는 갔고 다행히 무사히 제대했다. 자신감이 좀 생겼다. 대학은 방송영상과에 들어갔다. 연기과를 가고 싶었지만, 부모가 납득할 만한 직업을 고민하다 선택했다. 시간이 갈수록 다시 무기력감이 밀려들었다. 자취방이 잡동사니와 쓰레기로 발 디딜 틈이 없어질 때까지 몇 달씩 은둔했다. 문득문득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영상을 찍어 기록도 해봤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지난해 우연히 친구 두 명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은둔 생활을 얘기했다. 친구들은 걱정해주고 편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친구들 반응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어도 된다는 걸 느꼈다. 이때부터 온라인 상담도 받고 정신과도 찾았다. 지난해 여름 K2를 찾았고, 거처도 옮겨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사람을 대하는 게 조금씩 편해졌다. 공동생활을 취재하러 온 지역 문화재단의 프로젝트팀에 합류해서 일 경험도 했다. 뮤지컬 공연에도 참여했다. 처음엔 빡빡한 일정이 많이 버거웠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아졌다.

지난 5월 고보리 모토무 K2 대표가 지원사업을 해보겠느냐고 제안했다. “제 은둔 경험으로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덥석 맡았다”고 했다. “은둔 경험 ‘흑역사’가 밑거름이 되어 다른 은둔형 외톨이가 세상 문을 열고 나올 수 있게 돕는다는 매력에 설蔑굅 덧붙였다. 그는 “가정·학교 폭력 등 서로 다른 이유로 은둔했던 또래의 방문이 현재 은둔하고 있는 청년들의 마음을 흔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유씨는 1인 미디어 크리에이터를 다시 꿈꾼다. 희망을 담아 그는 인생 그래프에 30대 이후는 80점을 훌쩍 넘게 그려 넣었다.

성북의 사회적 사각지대 청년 지원 사업은 올해 연말까지 진행한다. 은둔형 외톨이 등 사회적으로 상처받은 청년들을 돕는 사업이 요리·미술·영화·연극·글쓰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사업 시작도 늦춰졌는데, 재확산으로 프로그램 진행이 녹록지 않다. 참여 기관 4곳(K2인터내셔널코리아, 청년문간사회적협동조합, 리커버리센터, ㈔우리들의 성장이야기)은 어렵게 시작한 사업이 잘 마무리될 수 있게 서로 도와가며 진행하고 있다.

요리를 매개로 회복을 돕는 ‘쿠킹 회복 프로그램’은 리커버리센터가 운영한다. 김옥란 센터장은 “은둔이 몇 년씩 이어지면 현실감이 떨어지고 뇌 활동 저하로 인지 능력도 떨어진다”며 “다른 사람들과 요리하기나 그릇 만들기 등으로 소박한 즐거움을 느끼는 게 회복 과정의 하나”라고 했다.

청년 관련 영화를 보고 상담사·평론가·감독 등과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은 청년문간사회적협동조합이 기획했다. 7월29일과 30일 저녁, 청년카페 문간과 리커버리센터에서 각각 진행했다. 청년 12명이 참석했다. 단편영화 두 편(‘쓰리룸’ ‘평양냉면’)의 연출 감독이 나와 영화 제작 스토리와 등장인물을 통한 메시지, 힘들었던 촬영 뒷이야기 등을 했다. 참가자들은 영화를 본 느낌을 나눴다. 어르신의 자서전을 쓰는 프로그램도 9월부터 한다. 이문수 청년문간 이사장은 “참여 청년들은 각자 다양한 이유로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며 이번 사업을 계기로 고립 청년과 가족을 돕는 지원이 이어지길 기대했다.

고립 청년과 멘토 청년이 각각 강연자와 저자가 되는 프로젝트는 ㈔우리들의 성장 이야기가 진행한다. 20대 고립 청년은 연극·미술 등 아트플레이로 마음 열기 활동을 한다. 30대 멘토 청년은 구술 생애 기록 교육을 받는다. 고립 청년이 자신의 은둔 경험으로 강연하고, 멘토 청년은 그 내용을 책으로 펴낸다.

김태훈 우리들의 성장이야기 대표는 프로젝트를 기획해 운영하면서 청년들과의 대화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많은 청년이 자신들의 얘기를 누군가가 들어주길 원했다. 그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며 고립 청년들이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길 기대했다.

은둔형 외톨이와 관련해 아직 합의된 용어조차 없다. 한국 사회가 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최근 2~3년 새 은둔형 외톨이 관련 법안이나 조례 발의가 있었다. 광주광역시가 지난해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조례를 제정해 올해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서울 시의회에서 조례안이 2017년 발의됐지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최근 은둔형 외톨이 지원연대 준비모임(준비모임)이 만들어져 지난 5일 세미나를 열었다. 준비모임은 K2인터내셔널코리아와 GL학교밖청소년연구소 등 은둔형 외톨이 지원기관과 전문가들이 만들었다. 세미나에선 코로나19 장기화로 은둔형 외톨이가 더 늘어날 거라는 전망과 더불어 공공·민간이 힘을 모은 맞춤 정책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윤철경 GL학교밖청소년연구소장은 “13만5천 명은 최소한의 숫자”라며 “관련 조례나 지원센터 등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재원 확보와 전문인력 양성, 인식 개선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25일에는 서울시의회와 준비모임이 은둔형 외톨이를 지원하는 조례 제정을 위한 온라인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자로 참석한 유씨는 가장 어려웠던 점으로 ‘은둔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한 점’을 꼽았다. ‘내가 나약해, 게을러, 끈기가 없어’ 등 자신을 탓하고, ‘내가 못나서, 불운해서’로 자기 비하를 하다 보면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절대 혼자서는 은둔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외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7월28일 고립 청년의 회복을 돕는 리커버리센터(성북구 보문로)에서 쿠킹 회복 프로그램이 열렸다. 참여자들이 역할을 나눠 요리하고 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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