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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고, 배송하고, 받고…긴급 돌봄 도시락에 담긴 ‘연대의 맛’

등록 : 2021-01-2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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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공동기획 ‘이웃이 경제다’ ❹

선한 영향력 퍼뜨리기…중장년 라이더, 식사 지원 서비스 공동배송

1월13일 오전 종로구 창신동 쪽방촌에서 서울플랫폼라이더협의회 회원인 이창훈씨가 도시락 배달을 하고 있다. 도시락은 서울시 돌봄SOS센터의 식사 지원 서비스로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이 만들었다. 협의회는 지난해 하반기 공동배송 시범사업을 한 뒤 올해부터 자체적으로 배달한다. 중장년 배달라이더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협동조합으로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동네에서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관계망이 넓어졌어요”

지난해 서사경센터 지원, 시범 운영

관악에선 안부카드 활용 주민 배송도

라이더 뜻 모아 협동조합 설립 추진

지난 13일 아침, 전날 내린 눈으로 곳곳에 얼어붙은 빙판길이 남아 있어 차도 사람도 조심하며 다니고 있었다. 종로구 인의동의 오래된 4층짜리 상가 건물 앞에 오토바이가 멈춰 섰다. 배달 라이더 양영조(43)씨가 뒤편 박스에서 흰 비닐봉지를 꺼냈다. 손에 든 휴대전화로 앱을 열어 주소, 이름, 도시락 수를 확인하고 재빨리 4층까지 걸어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도시락 왔어요!” 잠시 뒤 집 안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고맙습니다. 놓고 가주세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양씨가 배달한 도시락은 서울시 돌봄SOS센터의 식사 지원 서비스다. 1인 기준 연간 30회 이용할 수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25개 모든 자치구에서 시행한다. 현재 65개 업체가 식사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 가운데 80%가 사회적경제기업들이다. 이들은 취약계층을 고용하거나 친환경 식자재를 사용하는 등 사회적 가치도 담아 도시락을 만들고 있다.

배달라이더 양영조씨가 종로1234동 주민센터 앞에서 사회적기업 숲푸드 도시락을 받아 배달상자에 넣고 있다.

도시락 주문량이 늘면서 배송 문제를 겪는 사회적경제기업이 적잖았다. 배송 단가와 시간이 일반 배송업체를 이용하기에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도시락 단가 7800원에서 배송료가 2천원을 넘기 어렵다. 일반 배송업체 평균 단가 3500원에 견줘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일반 배송업체는 오전 10시부터 업무를 하는데, 도시락 배송은 그 전에 이뤄져야 한다.

도시락 배송 문제를 풀어보기 위해 지난해 하반기 공동배송 사업단이 시범 운영됐다. 사회적협동조합 함께강동이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의 임팩트 확장 지원 공모사업에 선정돼 추진했다. 라이더 공동배송 모델과 주민 조직화 모델, 두 가지를 실험했다.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의 긴급 돌봄 도시락.

라이더 공동배송 시범사업 운영은 서울시 플랫폼라이더협의회가 맡았다. 협의회는 동남권 노동자 종합지원센터 지원으로 중장년 배달 라이더들의 안전한 노동환경 조성을 위해 만들어졌다. 40~60대 20여 명의 라이더가 모여, 자치구 6곳(도봉, 서초, 송파, 용산, 종로, 중랑)에서 긴급 돌봄 도시락 배달을 했다. 시범사업은 지난해 12월 끝났다. 그러나 플랫폼라이더협의회는 올해 자체적으로 하는 배송을 종로구에서 시작했다.

협의회 회원인 양영조씨는 다른 배달 일을 하면서 오전 시간에 도시락 배송을 한다. “부업 삼아 시작했는데, 어르신들이 반겨줘 보람이 더 크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 이전엔 어르신들이 고맙다며 음료수 등을 건네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집이 산꼭대기에 있어 오토바이를 아래에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간 적도 있는데, 도시락을 기다리는 어르신을 보니 힘든 게 싹 가셨다”고 했다.

이날 창신동 쪽방촌 도시락 배달을 맡은 이창훈(67)씨도 협의회 회원이다. 수입이 줄면서 가계에 보탬이 될 것 같아 배달 일에 나섰는데, 주문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젊은 라이더들은 배달하면서 주문을 따기도 하는데, 나이 든 우리는 어렵다”고 했다. 시범사업 때 스타트업과 만든 전용앱 ‘플리즈’를 사용하는데, 콜을 받는 방식 대신 배정 방식이라 이씨가 훨씬 수월하게 쓸 수 있다.

이씨는 지난해 연말 두 달가량 이곳 배송을 맡았다. 쪽방촌 안에는 오토바이가 들어갈 수 없어 바구니에 도시락을 담아 골목골목을 찾아간다. 거처를 수시로 옮기는 주민도 많아 처음엔 헤매기도 했는데, 이젠 어렵지 않게 배달한다. 쪽방촌 상담소의 김지연 간호사는 “쪽방촌에는 주소도 없어 배달하기 힘든데, 동네 지리를 잘 알아 척척 배달해줘 저희 일손도 덜어준다”고 했다.

이씨는 “쪽방촌 주거환경이 정말 열악하다”고 했다. 계단이 좁고 가팔라 뒷걸음으로 내려와야 하는 곳도 적잖다. 체구가 좀 큰 편인 그는 ‘이곳에서 사는 사람은 얼마나 불편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한다. 첫 배송 때 김 간호사가 유의할 점을 미리 알려줘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특히 술에 취한 주취자나 난폭성 있는 주민은 응대하지 않고 피한다. 이씨는 “1평 남짓 방에서 기다리다 도시락을 받고 좋아하는 주민들을 보면 뿌듯하다”며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는 계속 도시락 배달을 하고 싶다”고 했다.

창신동 쪽방촌 주민이 도시락을 받고 있다.

라이더 공동배송에 대한 도시락제조 사회적경제기업들의 반응은 좋은 편이다. 취약계층을 고용해 도시락 사업을 하는 사회적기업 숲푸드의 이재형 대표는 “지난해 하반기 도시락 주문량이 늘면서 배송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공동배송으로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일반 배달업체한 곳이 좋은 뜻으로 나서줬는데 라이더 모집이 어려워 오래가지 못했다. 이에 용산구 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 도움을 청해 공동배송 서비스를 이용했다.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은 친환경 식자재로 만든 건강한 도시락을 지난해 11월부터 어려운 이웃에게 보내고 있다. 성윤숙 한살림 서울돌봄사업부 활동가는 “배달 라이더들이 (단순히 도시락만 배달하는 것이 아니고) 주민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소통 창구가 돼준다”고 했다. 주민들이 남긴 감사의 쪽지를 전해주기도 하고, 도시락을 받는 주민들은 병원 입원 등으로 주문을 취소해야 할 때도 배송기사에게 얘기한다.

성씨는 “일하는 사람끼리 정도 생겼다”고 했다. 돈 받고 하는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추운 날, 궂은 날에도 도시락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을 위해 나가는 배송기사에게 간식거리를 나누기도 한다. 배송기사들은 배달하기 편하게 포장 개선을 요청하면서 다음날 포장에 필요한 노란 고무줄 한 통을 사 왔다. 그는 “동네에서 이런 작은 조직들이 협력하고 연대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참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지역에서 도시락을 만드는 사람, 배달하는 사람, 돌봄을 받는 사람들이 엮어지면서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관계망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지난해 배송사업단 시범 운영의 주민 조직화 모델은 지역 주민 도보 배송으로 이뤄졌다. 관악구에서 지역의 예비사회적기업(에덴스푸드)이 만든 도시락을 일거리가 필요한 주민 2명이 걸어서 배송하는 실험을 3주 정도 했다.

안부카드를 다회용기 도시락에 넣어 배달한 점도 관심을 끌었다. 안부카드는 홀몸 노인이 건강, 기분, 식사 등 5가지 이미지 체크리스트에 벨크로(찍찍이)를 붙여 손쉽게 체크할 수 있게 했다. 지역에 있는 서울대의 이장섭 교수(디자인학부)가 디자인하고 베블리협동조합이 만들었다. 시범 기간에 다회용기 수거 때 안부카드를 확인해 3회 이상 ‘아니오’로 표시된 경우가 있어 돌봄 매니저 등에게 알렸다.

이종환 관악사회적경제통합지원센터장은 “도시락을 받는 주민들은 고립감을 덜 수 있어 좋다고 하고, 배달한 주민들은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자신도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이 생겼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일자리와 복지가 결합하는 공공배송 사업이 됐으면 한다”며 “도보 배송이 많은 물량을 감당하기엔 한계가 있어, 올해는 차량으로 안부카드를 넣어 배달하는 시범사업을 해볼 계획이다”라고 했다.

라이더 공동배송 시범사업에 참여했던 서울시플랫폼라이더협의회는 협동조합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남궁연 회장은 “자체적으로 배송사업 계획을 세우는 데 애로사항이 많다”고 했다. 배송사업을 25개 전체 자치구로 넓혀 갈 수 있다는 건 확인했는데, 정책의 지속성이 어떻게 될지 몰라 여러 가지로 고민스러운 실정이다.

가장 어려운 점으로 그는 배송 단가를 꼽았다. 배차 담당자의 인건비가 나와야 하는데 현재 배송 단가 2천원으로는 조합 수수료를 걷기 어렵다. 그는 “질 좋고 양도 많은 도시락 단가가 현실화돼야 배송료 조정도 가능해 보인다”라며 “배달 라이더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협동조합으로 만들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관악구 신림동에서는 지난해 연말 3주 정도 지역 주민 도보 배송으로 돌봄SOS센터 식사 지원 서비스가 이뤄졌다. 지역의 예비사회적기업(에덴스푸드)이 만든 도시락을 일거리가 필요한 주민 2명이 걸어 배송했다. 사진은 배송 주민이 회수한 안부카드를 확인하는 모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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