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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땜쟁이’란 소리를 들으며 기술을 천대하던 시절을 견뎌낸 이승근(71) 씨는 오디오 수리 장인의 경지에 올랐다. 14일 오후 세운상가의 작업장에서 자신이 겪은 세운상가와 오디오 수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장수선 인턴기자grimlike@hani.co.kr
지난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세운전자상가 7층 764호. 스피커 앰프(증폭기) 등 빈티지 오디오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비좁은 작업장에 (사)‘○○은대학연구소’의 윤상훈(30) 씨가 땀을 흘리며 무거운 짐을 안고 들어온다.
가게 주인이자 빈티지 오디오 수리 장인인 이승근(71) 씨는 자세히 보지 않고도 “토렌스 턴테이블이네”라며 수리 의뢰 물품이 스위스산 유명 브랜드라는 것을 바로 알아본다. 이씨는 턴테이블 상태를 점검하고 수리해야 할 부분을 윤씨에게 말했다. “카트리지 바늘이 망가지고, 턴테이블 회전속도가 안 맞고, 드라이브 벨트도 교체해 줘야 할 것 같아요.”
그러나 이 턴테이블의 수리 의뢰자는 윤씨가 아니다. 윤씨는 사연이나 추억을 간직한 고장 난 전자제품의 수리 신청을 받아서 세운상가 수리 장인에게 진단과 수리를 맡기는 프로젝트 ‘수리수리얍’을 기획한 ‘○○은대학연구소’의 직원이다. 윤씨는 올해 73살인 토렌스 텐테이블 수리 의뢰인에게 이씨의 진단 내용을 전달했다.
의뢰인은 “1979년 대우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지사에 부임해서 1984년까지 근무하면서, 음악을 좋아하는 부인과 함께 턴테이블로 음악을 들으며 외국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고 사연을 올린 뒤 고장 난 턴테이블을 들고 부인과 함께 연구소로 찾아왔다.
이씨는 1968년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건립된 세운전자상가의 영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산증인이다. “예전에는 서울의 전자 메카라고 해서 서울에서도 가장 번화한 동네로 꼽혔는데, 지금은 어두운 동네로 변해 버렸어요.”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대대적인 세운상가 개발 계획에 따라 입주 상인들이 대거 퇴거했으나 개발이 무산되면서 가게 상당수가 텅텅 비어버려 황량함마저 풍긴다. 그러나 이씨는 이날 턴테이블을 들고 온 윤씨를 가리키며 “저런 친구들이 열심히 일해 주고 있는 건 세운상가로서는 고무적인 일이다. 어떻게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윤씨가 속한 ‘○○은대학연구소’는 세운상가 도시재생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서울시로부터 거버넌스 부분 용역을 받아 지난해부터 세운상가 활성화에 힘을 쏟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행하고 있는 ‘수리수리얍’도 세운상가 활성화 프로젝트 중 하나다. ‘○○은대학연구소’ 홈페이지에는 지난 15일 현재, 고장 난 전자제품 50여 점이 사연과 함께 수리 의뢰됐다. 세운상가 내 수리 장인들은 ‘○○은대학연구소’의 도움을 받아서 오는 9월 ‘세운상가수리협동조합’을 설립할 예정이다. 수리 장인 이씨도 조합원 6명 중 한 명이다. 이씨는 오랜 수리 경력을 바탕으로 고장 난 빈티지 오디오를 가능한 한 원래 상태 그대로 복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아무리 기술력이 좋아도 진공관 시절 빈티지 오디오들을 뛰어넘는 제품으로 수리하기는 힘들어요. 그래서 어렵더라도 당시 부품을 구해서 회로대로 수리 복원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의뢰품은 수리 기간이 5개월이 걸리기도 했다. 이씨는 기술자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풍조를 안타까워하면서 수리 기술력 못지않게 손님과 신뢰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고 한다. 실제 한국의 빈티지 오디오 애호가들 상당수는 생산된 지 40년 이상된 앰프와 스피커 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애호가들은 고장이 났을 때나 성능을 높이려고 수리를 맡기는 일이 흔한데, 적정한 가격에 믿고 맡길 수 있는 엔지니어가 많지 않다고 주장한다. 반면 엔지니어들은 자신들의 기술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이씨는 이 때문에 수리 의뢰인들에게 정확하게 고장 상태를 설명해 주고 스스로 고칠 수 있도록 기술적 도움을 줘 손님들과 신뢰 관계 형성에 힘을 쏟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고치기 어려운 것은 고칠 수 있는 다른 곳을 알려 주기도 한다. 그런 만큼 ‘수리수리얍’ 프로젝트나 곧 출범할 ‘세운상가수리협동조합’은 의뢰인 편에서는 믿고 맡길 만한 곳이 생겨서 좋고, 세운상가 편에서는 상권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러면서도 이씨는 엔지니어들의 기술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에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예전에 전파사할 때 텔레비전을 고치려고 어느 댁에 갔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우리 아들이 머리가 나쁜데 아저씨처럼 기술자가 되면 좋겠다’고 말해서, 내가 뭐하는 사람인가를 한참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오디오 수리 기술이라는 게 머리 나쁜 사람이 간단히 배워서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나름 전기기술이나 소리의 원리 등을 공부해야 하거든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처음 우리가 오디오 기술 배울 때는 ‘땜쟁이’라고 했으니까요.” 1968년 세운상가가 생기기 이전에 청계천 바로 앞에서는 전축이나 라디오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수리하곤 했다고 이씨는 귀띔했다. 1984~1987년 게임기 제작 판매, 오디오 판매 가게 1년 운영 등 장사도 해 보았지만 체질에 안 맞았다는 이씨는 천상 엔지니어이다. 때론 수리비가 얼마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손님들이 주는 대로 받기도 한단다. 중학교 때 광석라디오(전력 없이 작동되는 라디오. 방연석, 실리콘, 저마늄 같은 광석을 이용해 만듦)를 만들면서 소리의 세계에 빠져든 이씨는 공업고등학교에서 오디오 기술을 배운 뒤 몇 년을 빼곤 줄곧 오디오 수리 외길 인생을 살아왔다. 현재 춘천 근처에 살고 있어 세운상가를 오가는 데 하루 4시간씩 걸리고, 일흔이 넘은 고령에도 납땜 인두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까닭은 오랫동안 자신에게 고장난 오디오를 들고 오는 단골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일주일에 사흘은 강촌에서 농사를 짓고 나흘은 작업장에 나옵니다. 10여 년 전에 일을 접고 강촌으로 들어갔는데, 단골들의 요청으로 다시 나오게 됐어요.(웃음)” 김도형 기자 aip209@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이씨는 1968년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건립된 세운전자상가의 영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산증인이다. “예전에는 서울의 전자 메카라고 해서 서울에서도 가장 번화한 동네로 꼽혔는데, 지금은 어두운 동네로 변해 버렸어요.”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대대적인 세운상가 개발 계획에 따라 입주 상인들이 대거 퇴거했으나 개발이 무산되면서 가게 상당수가 텅텅 비어버려 황량함마저 풍긴다. 그러나 이씨는 이날 턴테이블을 들고 온 윤씨를 가리키며 “저런 친구들이 열심히 일해 주고 있는 건 세운상가로서는 고무적인 일이다. 어떻게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윤씨가 속한 ‘○○은대학연구소’는 세운상가 도시재생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서울시로부터 거버넌스 부분 용역을 받아 지난해부터 세운상가 활성화에 힘을 쏟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행하고 있는 ‘수리수리얍’도 세운상가 활성화 프로젝트 중 하나다. ‘○○은대학연구소’ 홈페이지에는 지난 15일 현재, 고장 난 전자제품 50여 점이 사연과 함께 수리 의뢰됐다. 세운상가 내 수리 장인들은 ‘○○은대학연구소’의 도움을 받아서 오는 9월 ‘세운상가수리협동조합’을 설립할 예정이다. 수리 장인 이씨도 조합원 6명 중 한 명이다. 이씨는 오랜 수리 경력을 바탕으로 고장 난 빈티지 오디오를 가능한 한 원래 상태 그대로 복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아무리 기술력이 좋아도 진공관 시절 빈티지 오디오들을 뛰어넘는 제품으로 수리하기는 힘들어요. 그래서 어렵더라도 당시 부품을 구해서 회로대로 수리 복원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의뢰품은 수리 기간이 5개월이 걸리기도 했다. 이씨는 기술자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풍조를 안타까워하면서 수리 기술력 못지않게 손님과 신뢰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고 한다. 실제 한국의 빈티지 오디오 애호가들 상당수는 생산된 지 40년 이상된 앰프와 스피커 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애호가들은 고장이 났을 때나 성능을 높이려고 수리를 맡기는 일이 흔한데, 적정한 가격에 믿고 맡길 수 있는 엔지니어가 많지 않다고 주장한다. 반면 엔지니어들은 자신들의 기술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이씨는 이 때문에 수리 의뢰인들에게 정확하게 고장 상태를 설명해 주고 스스로 고칠 수 있도록 기술적 도움을 줘 손님들과 신뢰 관계 형성에 힘을 쏟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고치기 어려운 것은 고칠 수 있는 다른 곳을 알려 주기도 한다. 그런 만큼 ‘수리수리얍’ 프로젝트나 곧 출범할 ‘세운상가수리협동조합’은 의뢰인 편에서는 믿고 맡길 만한 곳이 생겨서 좋고, 세운상가 편에서는 상권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러면서도 이씨는 엔지니어들의 기술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에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예전에 전파사할 때 텔레비전을 고치려고 어느 댁에 갔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우리 아들이 머리가 나쁜데 아저씨처럼 기술자가 되면 좋겠다’고 말해서, 내가 뭐하는 사람인가를 한참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오디오 수리 기술이라는 게 머리 나쁜 사람이 간단히 배워서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나름 전기기술이나 소리의 원리 등을 공부해야 하거든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처음 우리가 오디오 기술 배울 때는 ‘땜쟁이’라고 했으니까요.” 1968년 세운상가가 생기기 이전에 청계천 바로 앞에서는 전축이나 라디오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수리하곤 했다고 이씨는 귀띔했다. 1984~1987년 게임기 제작 판매, 오디오 판매 가게 1년 운영 등 장사도 해 보았지만 체질에 안 맞았다는 이씨는 천상 엔지니어이다. 때론 수리비가 얼마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손님들이 주는 대로 받기도 한단다. 중학교 때 광석라디오(전력 없이 작동되는 라디오. 방연석, 실리콘, 저마늄 같은 광석을 이용해 만듦)를 만들면서 소리의 세계에 빠져든 이씨는 공업고등학교에서 오디오 기술을 배운 뒤 몇 년을 빼곤 줄곧 오디오 수리 외길 인생을 살아왔다. 현재 춘천 근처에 살고 있어 세운상가를 오가는 데 하루 4시간씩 걸리고, 일흔이 넘은 고령에도 납땜 인두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까닭은 오랫동안 자신에게 고장난 오디오를 들고 오는 단골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일주일에 사흘은 강촌에서 농사를 짓고 나흘은 작업장에 나옵니다. 10여 년 전에 일을 접고 강촌으로 들어갔는데, 단골들의 요청으로 다시 나오게 됐어요.(웃음)” 김도형 기자 aip209@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