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공유
한때 공장 굴뚝에서 뿜는 뿌연 연기로 가득했던 구로공단은 고층 건물이 즐비한 첨단 디지털 도시로 거듭났다. 이성 구로구청장이 구로디지털산업단지에 자리 잡은 태평양물산 사옥에서 ‘지밸리’의 변화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장수선 인턴기자 grimlike@hani.co.kr
“구로공단은 국가산업단지 1호입니다. 구로공단을 빼놓고는 우리나라 산업 근대화를 논할 수 없어요.” 이성(60) 구로구청장의 조용한 말투에 묻어난 단호함은 구로구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가까운 경제대국입니다. 그런데 산업화를 일군 역사를 기록하고 보관하는 산업박물관이 없습니다. 구로공단이 한국 최초의 국가산업단지입니다.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꿈을 실현한 곳입니다. 건물이야 어쩔 수 없더라도 역사는 남겨야지요. 공단의 역사와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의 모습, 생산한 제품들을 보존할 수 있는 박물관이 필요합니다.”
이 구청장은 행정고시 출신 공무원이었다. 2002년부터 4년간 구로구 부구청장으로 일할 때에도 산업박물관의 필요성을 수차례 제안했지만, 중앙정부는 귀를 막았다. “박물관을 왜 산업자원부에 이야기하느냐…뭐 이런 이야기만 들었지요.”
1964년 들어선 구로공단은 수출의 전진기지로 우리 경제에 큰 몫을 담당했지만, 노사 문제를 비롯한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1979년 신민당사 점거농성 시위를 벌여 한국 사회의 모순을 드러냈던 YH사건의 여공들이 일하던 곳도 구로공단이었다. 역사는 잊으면 반복된다고 한다. “제 형과 동생도 구로공단에서 일했습니다. 누이는 구로동에서 살았지요.” 이 구청장의 산업박물관 이야기는 되풀이하면 안 되는 역사의 교훈을 후대에 남겨 주자는 의도로 들렸다.
청년인턴제, 전시회 지원으로 지밸리 도와
산업박물관에 대한 이 구청장의 숙원은 곧 이뤄질 것 같다. “구로공단 정수장 터에 ‘지(G)밸리 지(G)스퀘어’가 들어섭니다. 넷마블게임즈가 개발하는 39층 규모의 복합업무시설로, 2019년 입주 예정입니다. 그 건물 일부 공간을 산업박물관으로 쓰기로 합의가 됐지요. 박물관 면적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 중입니다.”
사실 이 구청장이 바라던 산업박물관은 특정 공간에 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청장이 된 뒤 금천구와 성공회대와 함께 용역 검토를 했어요. 그때 나온 결론이 구로공단 전체를 박물관화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곳곳이 산업화의 현장이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 구청장은 당시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추억과 희망의 구로공단 여행’이란 도보여행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문화해설사와 함께 걸으면서 구로공단의 배경과 의미를 이해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구청장이 산업박물관으로 보존하고 싶어하는 구로공단은 벤처기업이 성장하던 2000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거듭났다. 구로구 구로동과 금천구 가산동의 공통된 영문 ‘지(G)’에 ‘밸리’를 붙인 ‘지밸리’로 더 많이 알려졌다. 굴뚝을 대신한 고층 건물이 즐비한 지밸리에는 1만여 개의 기업이 입주해 있다. 상주인구만 16만 명이다. 그러나 종업원 수 30명 미만의 중소기업이 대부분이다 보니 기업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쌓여 있다. “지밸리 기업들은 중소기업이라는 편견 때문에 구인난에 시달립니다. 실제로 일해 보면 전망 있는 기술을 가진 기업들이 많은데도요.” 구로구는 인턴사원 채용 기업에 인건비 일부를 지원하는 청년인턴제를 시행해 중소기업들을 도왔다. 지난 6년간 청년1018명이 인턴 제도에 참여했고, 이 가운데 909명이 지밸리 기업의 정규직 직원으로 채용됐다. 청년들이 현장에서 일하면서 기업과 함께 꿈을 갖도록 도운 결과다. 2015년 12월 설립한 ‘지밸리희망센터’에서는 취업 상담과 재취업 교육을 하며 청년들의 취업을 돕고, 부당노동행위 등 노동 조건에 대한 상담으로 청년들의 고용 환경 개선을 돕고 있다. 기술력은 있지만 기업 경영과 마케팅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과 기업인을 돕는 일에도 구로구는 열심이다. “입주 기업 간 협력을 위해 기업연합체 결성을 적극 지원합니다. 협력으로 경쟁력을 높이자는 거지요. 기업들에게는 새로운 기술을 국내외에 알릴 수 있도록 전시회 참가도 독려합니다.” 이 구청장은 지난해에 지밸리 기업들을 알리고 투자 유치를 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에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투자유치설명회에 참여했던 10개 기업 중 4곳이 해외 투자자의 주목을 받아 투자 유치를 하거나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서울의 유일한 국가산업단지인 지밸리는 산업단지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이름과 성격이 바뀌었지만, 관련 법률은 굴뚝 공장을 규제하던 그 시절 그대로인 탓이지요. 지밸리에는 산업용 건물만 지을 수 있습니다. 입주기업 종사자들을 위한 문화시설과 주거 공간도 필요한데, 그게 어려워요.” 지밸리를 저녁이 있는 산업단지로 한때 지밸리에는 보행로조차 없는 거리도 있었다. 산업단지라서 그렇다. 건물주를 설득해 확보한 보도에 가로수를 심고, 가동되지 않는 분수를 헐어내 청춘들을 위로할 무대 공간을 만들었다. “4년 전만 해도 저녁 7시 이후에는 단지에서 사람 그림자를 볼 수 없었어요.” 이 구청장이 어렵게 관련 법 개정과 지밸리 환경을 개선하는 일에 앞장서는 까닭은 도시든 산업단지든 결국 사람이 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도 도시 안에 산업을 이끄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 마련돼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 구청장의 생각이다. “좋은 산업단지는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생활 환경이 좋은가 나쁜가로 결정됩니다. 그런 면에서 구로디지털단지는 더 노력해야지요.” 이 구청장은 일터와 주거 공간, 문화 공간을 걸어서 오갈 수 있는 지밸리를 꿈꾼다. 사람이 행복해야 일도 즐겁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로구는 여전히 산업 도시 구로구 전역을 무료 와이파이 구역으로 만드는 일 또한,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모두에게 유익해야 한다는 철학이 없다면 힘든 일이다. 구로구는 역 주변을 모두 와이파이 구역으로 만들었고, 올해는 버스정류장과 안양천, 학교 등으로 그 범위를 넓히고 있다. 구로구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영등포교정시설 터와 개봉동 한일시멘트 공장 터는 뉴스테이(기업형 임대주택)로 바뀐다. 신도림역 주변은 이미 상전벽해다. 고척 돔경기장 주변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 구청장은 “과거 공장이었던 땅을 주거 공간으로 바꾼 것”이 다른 지역개발과 다른 점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정리하는 동안 지밸리 입주기업 인라이플에서 일하는 김승기(38) 차장을 만났다. “‘구디’가 좋아졌어요. 문화 공간도 많이 생기고 사람 만나기도 편해졌지요.” ‘구디’는 구로디지털단지의 애칭이다. 지역이 애칭을 얻었다는 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뜻이겠다. 이 구청장은 “구로구의 상징은 산업입니다”라고 말한다. 굴뚝이 상징이었던 구로공단은 가난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과거 청춘들의 아픔을 떠오르게 한다. 첨단 건물이 상징이 되는 디지털단지는 앞으로 30년쯤 뒤에 무엇을 떠오르게 할까? 이 구청장이 구로구 도보여행 이름을 ‘추억과 희망의 구로공단 여행’이라 붙인 까닭에 답이 있지 않을까. 윤지혜 기자 wisdo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사실 이 구청장이 바라던 산업박물관은 특정 공간에 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청장이 된 뒤 금천구와 성공회대와 함께 용역 검토를 했어요. 그때 나온 결론이 구로공단 전체를 박물관화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곳곳이 산업화의 현장이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 구청장은 당시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추억과 희망의 구로공단 여행’이란 도보여행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문화해설사와 함께 걸으면서 구로공단의 배경과 의미를 이해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구청장이 산업박물관으로 보존하고 싶어하는 구로공단은 벤처기업이 성장하던 2000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거듭났다. 구로구 구로동과 금천구 가산동의 공통된 영문 ‘지(G)’에 ‘밸리’를 붙인 ‘지밸리’로 더 많이 알려졌다. 굴뚝을 대신한 고층 건물이 즐비한 지밸리에는 1만여 개의 기업이 입주해 있다. 상주인구만 16만 명이다. 그러나 종업원 수 30명 미만의 중소기업이 대부분이다 보니 기업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쌓여 있다. “지밸리 기업들은 중소기업이라는 편견 때문에 구인난에 시달립니다. 실제로 일해 보면 전망 있는 기술을 가진 기업들이 많은데도요.” 구로구는 인턴사원 채용 기업에 인건비 일부를 지원하는 청년인턴제를 시행해 중소기업들을 도왔다. 지난 6년간 청년1018명이 인턴 제도에 참여했고, 이 가운데 909명이 지밸리 기업의 정규직 직원으로 채용됐다. 청년들이 현장에서 일하면서 기업과 함께 꿈을 갖도록 도운 결과다. 2015년 12월 설립한 ‘지밸리희망센터’에서는 취업 상담과 재취업 교육을 하며 청년들의 취업을 돕고, 부당노동행위 등 노동 조건에 대한 상담으로 청년들의 고용 환경 개선을 돕고 있다. 기술력은 있지만 기업 경영과 마케팅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과 기업인을 돕는 일에도 구로구는 열심이다. “입주 기업 간 협력을 위해 기업연합체 결성을 적극 지원합니다. 협력으로 경쟁력을 높이자는 거지요. 기업들에게는 새로운 기술을 국내외에 알릴 수 있도록 전시회 참가도 독려합니다.” 이 구청장은 지난해에 지밸리 기업들을 알리고 투자 유치를 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에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투자유치설명회에 참여했던 10개 기업 중 4곳이 해외 투자자의 주목을 받아 투자 유치를 하거나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서울의 유일한 국가산업단지인 지밸리는 산업단지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이름과 성격이 바뀌었지만, 관련 법률은 굴뚝 공장을 규제하던 그 시절 그대로인 탓이지요. 지밸리에는 산업용 건물만 지을 수 있습니다. 입주기업 종사자들을 위한 문화시설과 주거 공간도 필요한데, 그게 어려워요.” 지밸리를 저녁이 있는 산업단지로 한때 지밸리에는 보행로조차 없는 거리도 있었다. 산업단지라서 그렇다. 건물주를 설득해 확보한 보도에 가로수를 심고, 가동되지 않는 분수를 헐어내 청춘들을 위로할 무대 공간을 만들었다. “4년 전만 해도 저녁 7시 이후에는 단지에서 사람 그림자를 볼 수 없었어요.” 이 구청장이 어렵게 관련 법 개정과 지밸리 환경을 개선하는 일에 앞장서는 까닭은 도시든 산업단지든 결국 사람이 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도 도시 안에 산업을 이끄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 마련돼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 구청장의 생각이다. “좋은 산업단지는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생활 환경이 좋은가 나쁜가로 결정됩니다. 그런 면에서 구로디지털단지는 더 노력해야지요.” 이 구청장은 일터와 주거 공간, 문화 공간을 걸어서 오갈 수 있는 지밸리를 꿈꾼다. 사람이 행복해야 일도 즐겁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로구는 여전히 산업 도시 구로구 전역을 무료 와이파이 구역으로 만드는 일 또한,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모두에게 유익해야 한다는 철학이 없다면 힘든 일이다. 구로구는 역 주변을 모두 와이파이 구역으로 만들었고, 올해는 버스정류장과 안양천, 학교 등으로 그 범위를 넓히고 있다. 구로구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영등포교정시설 터와 개봉동 한일시멘트 공장 터는 뉴스테이(기업형 임대주택)로 바뀐다. 신도림역 주변은 이미 상전벽해다. 고척 돔경기장 주변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 구청장은 “과거 공장이었던 땅을 주거 공간으로 바꾼 것”이 다른 지역개발과 다른 점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정리하는 동안 지밸리 입주기업 인라이플에서 일하는 김승기(38) 차장을 만났다. “‘구디’가 좋아졌어요. 문화 공간도 많이 생기고 사람 만나기도 편해졌지요.” ‘구디’는 구로디지털단지의 애칭이다. 지역이 애칭을 얻었다는 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뜻이겠다. 이 구청장은 “구로구의 상징은 산업입니다”라고 말한다. 굴뚝이 상징이었던 구로공단은 가난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과거 청춘들의 아픔을 떠오르게 한다. 첨단 건물이 상징이 되는 디지털단지는 앞으로 30년쯤 뒤에 무엇을 떠오르게 할까? 이 구청장이 구로구 도보여행 이름을 ‘추억과 희망의 구로공단 여행’이라 붙인 까닭에 답이 있지 않을까. 윤지혜 기자 wisdo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