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소식

“훼철되기 이전 ‘원래의 경희궁 둘레길’ 개념공간부터 확보하자”

종로구, 1일 ‘우리가 몰랐던 경희궁 역사와 그 가치 바로 알기’ 심포지엄 열어

등록 : 2021-11-1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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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숭정전. 경희궁의 정전으로 1618년(광해군 10년)께 건립됐다.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졌던 곳이다. 경종·정조·현종 등 세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현재 위치의 숭정전은 복원된 건물이다.

숙종~정조 즉위까지 ‘최전성기 궁궐’

경복궁 중건 때 전각 상당수 옮겨져

일제강점기에는 ‘궁터’조차 상당히 훼손

김영종 구청장 “후손 위해 토론회 열어”

대한제국 틀로 보면 새로운 것 나타나

고종의 중립국 공인 정책 때 ‘역할 받아’

‘최대한 현상 유지’가 우리 세대의 과제


본래 권역 되살린 ‘궁성’ 표시 시작해야

경희궁을 찾은 시민들

“경희궁은 무료입장이 되는데다 한적해서 좋아요. 바람 쐬러 잘 오던 곳인데, 조선 시대때 궁 권역이 이보다 훨씬 컸다는 건 몰랐어요. 여기가 옛 흥화문 자리였다는 것도요. 그런 부분이 세련되게 더 표시되면, 저처럼 옛지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더 재밌게 볼 것 같아요.”

지난 2일 오후 2시께 경희궁을 나서 구세군회관을 거쳐 걸어가던 김진양(26)씨가 말했다. 같은 시각 경희궁을 찾은 시민은 한눈에 스무 명 가까이 돼 보였다.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 벤치에 일행과 앉아 있던 김아무개(40)씨는 “평소에도 궁궐 산책을 즐기는데, 경희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만큼 주목받는 역사적 공간은 아니었지만 곳곳이 호젓하고 숨은 매력이 크다. 개인적으론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조선 후기 광해군 때 지어 100여 개 전각이 빼곡했던 경희궁은 ‘서궐’로 불리며 숙종부터 정조 즉위까지 최전성기를 보냈다. 이후 1867년 경복궁 중건 때 전각의 상당수가 옮겨가 건축 자재로 쓰였고 궁궐 담장과 정문, 주요 전각인 숭정전과 회상전, 융복전 등만 남았다. 일제강점기에 궁 관리가 조선총독부로 넘어가며 본격적으로 해체됐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어떻게 인식하고 후대에 물려야 할까”

무분별한 건축 행위로 역사적 흔적과 유구가 사라지고 있는 서울의 오늘날, 경희궁도 다른 궁궐처럼 복원이란 빛을 볼 수 있을까. 만약 복원한다면 궁궐 권역의 범위는 어디까지 아울러야 할까. 나아가 서울시의 도시개발·지구단위계획과 어떻게 맞물려야할까.

해결책 모색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됐던 가운데 종로구는 지난 1일 광화문아트홀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우리가 몰랐던 경희궁 역사와 그 가치 바로 알기’ 심포지엄을 열어 오늘날 경희궁 위상을 되짚고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발표자로 홍순민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와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 오경택 재단법인 수도문물연구원장이 나섰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타 궁궐보다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경희궁에 대해 수시로 토론하며 후세대가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그 계기라도 마련해보고자 이번 심포지엄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경희궁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선 ‘조선의 궁궐 경영 방식’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다. 조선왕조에서 궁궐은 양궐체제로 기능하며, 법궁과 이궁을 동시에 운영했기때문이다. 홍순민 교수는 “17세기 중반 후기 양궐체제가 갖춰진 이후 임금들이 제일 많이 임어한 곳이 창덕궁이지만, 경희궁에서도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는 등 조선 후기 임금의 생활사뿐 아니라 정치사 역사 전반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쌓인 것은 사실”이라며 “경희궁 숭정전에서 열린 조회나 잔치 등 궁을 배경으로 하는 행사 기록화가 상당수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창덕궁에 비하면 적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경희궁 훼철의 주체를 ‘일제’에만 두는 일반적 인식에도 재고가 필요함이 거론됐다.

1865년부터 1868년까지 경복궁 중건 이후 고종이 공식적으로 경복궁으로 임어하자 법궁과 이궁이 조선 초기 양궐체제였던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돌아가고, 자연스레 경희궁 역할이 축소됐다. 이미 비워진 궁궐이기때문에, 일제가 경희궁의 ‘터’를 파괴한 것은 맞지만 궁궐의 기능까지 없앴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지점이다.

안창모 경기대 교수는 “‘일본이 훼철한 경희궁’이란 프레임이 맹목적 애국심을 불러 그동안 경희궁 참모습이 부각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경희궁은 공간과 건축 측면에서 대한제국이란 새로운 국가 틀 속에서 이해하면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고 제안했다.

“예를 들어 1899년 한청조약 이후 대한제국이 주권 유지를 위한 중요한 외교 행사로 ‘고종 즉위 40주년 칭경기념예식(잔치)’을 열어 중립국으로 공인받고자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때 역할을 부여한 곳이 정동의 덕수궁과 경희궁이었습니다.”

공간문화자원으로서 ‘터’에 점수를 매겨 후세대가 ‘가늠할 수 있게’ 기억의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점도 통했다. 홍순민 교수는“경희궁이 궁궐로서 역할이 부족했다고 해도, 최대한 현상을 유지하도록 하는 게 우리세대에게 주어진 과제”라며 “문화유산 ‘활용’과 ‘복원’의 의미를 재차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관광지로 개발해 모객에 중점을 두는 지금의 문화재 관리 방식이나 역사적으로 근거 없는 건물을 짓고 이를 복원이라 부르기 전에, 문화재 가치와 본질을 깊이 이해한 문화재 행정과 우리 시대에 맞는 가치 창출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궁성’ 표시와 안내판 통일부터

경희궁 본래 권역을 되살린 ‘궁성’ 표시부터 시작하는 방안도 모색됐다. 김기호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명예교수는 “시민들은 대부분 서울역사박물관과 숭정전 권역만경희궁이라고 인식한다. 현재 공공과 민간에서 발굴·기록 등 학술적 일은 많이 하지만, 시민들이 ‘지금 역사 속에 있다’고 인지할 수 있는 일상의 접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2001년 복원된 금천교.

이를 위한 방안으로 △경희궁 동쪽으로 새문안교회와 성곡미술관까지 경희궁 본 궁역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둘레길 개념의 공간확보 △조선시대 후기 궁궐도 도면을 바탕으로 경희궁지 안내시스템 정비 △서울역사박물관 내 경희궁지 유구 안내방법 확대 등을 들었다.

오경택 원장은 “발굴하는 실무자 입장에서 볼 때 발굴이 끝난 뒤 설치되는 안내판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데다 저가의 재료로 중구난방인 점이 아쉽다”며 “기왕에 궁의 위상에 맞는 안내판을 설치해 관리한다면 인식에 대한 제고가 조금이나마 이뤄질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경희궁이 가진 문화유산의 가치를 되짚는 시간이 중요함에도 그동안 해오지 못했다는 공감대 속에서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 “지구단위계획이나 도시건축계획 등 통제와 재산권이 충돌하며 개발이냐 보존이냐 논쟁이 많지만, 경희궁은 숙종 대왕이 탄생한 궁궐이자 숙종조에서 영종조에 이르러 꽃피운 문화적 시발점의 공간으로서도 보존이 필요하다”며 “이러한 인문학적 의미를 비롯해 앞으로도 다각도로 조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글·사진 전유안 기자 fingerwhal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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