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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마음껏 보고 그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화 주인공이 벽화와 조형물, 인형으로 되살아난 골목이 있다. 거리 이름도 ‘재미로’.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남산 서울애니메이션센터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재미로 시작점인 명동역 3번 출구 앞 플레이마켓을 찾은 시민들이 캐릭터 인형이 나눠 주는 풍선을 받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짜장 행성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짜장면을 찾자!’
<짜장면을 좋아하는 영웅의 이야기>라는 제목이 달린 만화책을 펼치니, 12컷의 짧은 만화가 실려 있다. 색연필로 거칠게 그린 듯한 그림체는 서툴지만 스토리가 기발하다. 굵은 면으로 칭칭 둘러싸인 짜장 행성에 단무지 별, 짬뽕 행성까지 등장한다. 주인공인 영웅이 짜장면을 먹기 위해 짜장 행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짬뽕 행성으로 향한다는 이야기다.
작가는 ‘J’. 초등학교 4학년인 김주완(11) 군의 필명이다. 김 군의 만화는 서울 중구 남산동 재미로의 ‘삼박자 만화공방’에서 탄생했다. “한 시간 만에 만화책 한 권을 뚝딱 완성해요.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런 스토리를 생각해냈을까 놀랄 때가 많죠.” 공방에서 만화책 만들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만화 작가 소공(46) 씨가 아이들이 만든 만화책을 내보이며 말했다.
지난달 문을 연 삼박자 만화공방은 만화 작가 소공, 콘텐츠 감독 아말록, 금속공예가 송송화의 공동 작업장이자 체험형 오픈 스튜디오다. 공방의 전시장에는 시민들이 그린 만화책과 그림 사본이 빼곡하게 전시돼 있다. 갤러리를 연상케 하는 진열창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절로 붙잡는다. 공방에서는 만화 그리기와 만화책 만들기(1만5000원), 캔버스에 그림 그리기(5000원, 8000원)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이곳의 큰 매력은 만화 작가가 상주한다는 점이다. 만화를 처음 그려 보더라도 작가의 도움을 받아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 12컷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말풍선에 무슨 대사를 적을지는 체험자가 결정한다. 작가는 색연필이 좋은지, 물감이 좋은지 등의 기술적 조언을 주로 해 준다.
만화책을 완성하면 그 자리에서 스캔하고 인쇄해 아트북 형태로 가져갈 수 있다. <우당탕탕 세 자매>(이채영·10), <진실을 말하는 아이>(설지원·10), <해적의 모험>(손태양·10) 등은 이렇게 탄생한 세상에 하나뿐인 만화책이다.
삼박자 만화공방이 있는 ‘재미로’에서는 다양한 만화 세상이 펼쳐진다. 뽀로로, 타요버스 등의 그림은 물론이고 만화나 웹툰, 피규어를 보고 만드는 공간이 여기저기에 있다. 재미로는 지하철 4호선 명동역 3번 출구에서 남산 서울애니메이션센터로 가는 퇴계로 20길, 450여m의 길 이름이다.
애니메이션센터의 콘텐츠를 시민과 공유하기 위해 서울시가 2013년 하반기부터 길을 닦았다. 명동역 3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마주치는 작은 공터가 출발점이다. 이곳에서 매주 금·토요일에 캐릭터 상품 판매와 무료 캐릭터 페인팅 등이 진행되는 플레이마켓이 열린다.
플레이마켓 공터에서 몇 걸음을 옮기면 체험 기반 만화 문화 공간인 ‘재미랑’이 나타난다. 가장 먼저 만나는 재미랑 1호점은 남산동 공영주차장 4·5층의 웹툰공작소다. 4층은 한류 콘텐츠 캐릭터 상점이고, 5층은 체험실이다. “실제 웹툰 작가들이 사용하는 태블릿이에요.” 웹툰 그리기 체험을 진행하는 이종혁(31) 모델링 디자이너가 태블릿 피시로 웹툰을 그리는 방법을 보여 준다. 동그란 원으로 시작된 스케치가 골격이 있는 사람이 되고, 색까지 칠하자 실제 포털에 연재되는 웹툰의 캐릭터가 됐다. 이 밖에 피규어 커스텀, 배지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입체(3D)프린터로 만든 건담, 아이언맨 피규어 등이 벽면을 채우고 있다.
웹툰공작소에서 나와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재미랑 2호점인 ‘재미로 사쿤’을 만날 수 있다. 아주 옛날 남산에 도깨비가 살았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탄생한 도깨비 ‘사쿤’을 상품화한 캐릭터 상점이다.
재미랑 3호점인 만화박물관은 4호점 삼박자 만화공방의 맞은편에 있다. 4층 건물인 만화박물관의 지하와 1층은 상설 만화 전시회 공간이다. 10월까지 <미운 오리 새끼> <인어공주> 등으로 유명한 덴마크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2층에선 가상현실(VR) 게임기와 터치패드 등을 이용해 만화에 나오는 게임 등을 즐길 수 있다. 3층은 웹툰 작가들의 작업실이고 4층은 만화책을 읽을 수 있는 휴식 공간이다. <명탐정 코난> <식객> 등 유명 만화가 비치돼 있다. “발 뻗고 만화책 읽을 수 있어서 편해요.”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던 김세영(24) 씨가 속삭였다. 만화박물관 이용은 모두 무료다.
골목 곳곳의 벽화와 캐릭터 조형물도 놓치면 손해다. 만화방, 사진관 등의 모습이 담긴 ‘과거여행길목’, 박수동·신문수 등 원로 명랑만화 작가들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명랑골목’은 시간여행을 온 듯한 재미에 빠져들게 한다.
서울시는 관광객 유입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재미랑 5·6호점도 올해 안에 문을 열 계획이다. 서울시에 재미로 운영을 위탁받은 서울산업진흥원의 기정구 팀장은 “만화는 여러 세대가 공감하는 보편성과 친화력을 가진 문화 콘텐츠”라며 “재미로가 시민들이 만화를 체험하고 즐기는 도심 명소로 자리 잡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남산 갔다가 내려오는 길이에요. 거리에 캐릭터가 있으니 생기가 느껴지네요.” 토요일인 지난 17일 플레이마켓에서 은비(10), 솔비(8)가 손등의 물고기와 무지개 페인팅을 연신 자랑하자 엄마 정영희(41) 씨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정고운 기자 nimoku@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