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엄마의 베를린살이

사라져가는 통일독일 구호 "조국은 하나다"

등록 : 2016-10-20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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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이스트사이드갤러리에 보존되어 있는 베를린 장벽의 일부. 이재인 제공

저녁 8시가 훌쩍 넘은 시각에도 지하철은 사람들로 붐볐다. 기차가 시내로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생기를 더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킬 정도였다. 약간의 흥분과 또 약간의 알코올 덕분에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사람들의 얼굴이 오늘이 ‘평소’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10월3일, 오늘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과 서독이 하나가 된 날이다. 그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공식 행사 외에도 독일 전역에서 크고 작은 파티가 벌어졌다. 물론 베를린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베를린에서는 요즘 건축물에 형형색색의 빛을 비추어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빛의 축제”가 한창이라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다.

기차가 시내 한복판을 지나갈 때쯤 기차 안은 만원이 되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그때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맥주병을 하나씩 들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더니 영국식 악센트가 섞인 영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좀 전에 그곳에서 그것을 봤냐는 둥, 정말 멋지지 않았냐는 둥,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느냐는 둥, 어디에 가면 멋진 파티가 있을 거라는 둥, 깔깔거리며 마치 자신들 이외에는 모두가 풍경이라는 듯 그들만의 분위기에 심취에 있는 그 모습이 영락없는 관광객의 모습이었다. 그랬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 같은 날 조금 눈치 없는 관광객 몇 명에 신경을 쏟을 사람들도 없었다. 사람들은 한두 번 힐끗힐끗 눈길을 주고는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귀에 익은 구호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외국인은 나가라. 독일을 떠나라! 메르켈과 외국인은 독일을 떠나라!” 구호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회를 거듭할수록 목소리를 더해가며 반복되고 있었다. 기차 안에는 순식간에 정적 아닌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가 나는 곳을 응시했고 그곳에는 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조금 있자니 군데군데에서 사람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입 닥쳐!” “조용히 좀 합시다!” 그러더니 어딘가에서 또 다른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여보시오. 당신들의 애국심은 높이 사는 바요. 하지만 데모는 지정된 장소에서 하시오. 행여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들의 그 흉한 구호를 독일인의 구호라 착각할까 두렵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차 안은 고성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오늘 드레스덴을 중심으로 독일 전역에서 벌어진 이런 시위가 사람들의 마음을 둘로 갈라놓았다는 뉴스를 보았다. 아쉽다. 콘크리트 장벽이 무너지며 동·서가 부둥켜안던 순간의 그 어마어마한 감격도 어느새 역사책의 한 귀퉁이로 사라져간다. “우리의 조국은 하나!”(Deutschland einig Vaterland) 26년 전 오늘 독일을 뒤흔들던 이 세 마디는 분명 독일인의 구호였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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