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엄마의 베를린살이

만남의 소중함

등록 : 2017-05-1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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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한편에 있는 만국시계. 전 세계의 시간을 보여주는 광장의 상징물이다. 이재인 제공
“사람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것만으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동물적인 나이가 있을 뿐 인간으로서의 정신 연령은 부재한다. 반드시 어떤 만남에 의해서만 인간은 성장하고 또 형성된다. 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혹은 사상이든 간에 만남에 의해서 거듭거듭 형성되어간다.”

법정 스님의 <영혼의 모음> 중에서 ‘만남’이란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 인생의 만남은 유학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다. 낯선 언어, 낯선 가치, 심지어 낯선 냄새까지, 쉴 새 없이 새로운 무언가와 부딪히며 살아가던 날에는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질문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해가며 방황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그 모든 만남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낯설기만 했던 타국이 제2의 고향이 된 지금까지도 미처 만나지 못한 것들은 수없이 많다.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그렇기 때문에 광장 한편에 있는 카우프호프백화점 앞 둥그런 시계 밑은 종종 사람들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한다. 그날 나는 남편이 선물해준 일본산 수첩에 끼울 속지를 사러 그곳에 갔다. 독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터넷을 뒤져 겨우 찾아낸 곳이 그 근처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종이가게라는 곳에 들어가 보았다. 종이와 필기구만 파는 가게였다. 너무 낯설어 몇번 두리번거리다가 그냥 나가려는데 한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그제야 가방에서 주섬주섬 수첩을 꺼내 보이며 속지 한권 달라고 하자 그 사람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금세 어디선가 속지 한 무더기를 들고 와 각각의 특징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연필로 쓸 것인지 만년필로 쓸 것인지, 쓸 것인지 그릴 것인지, 상상도 못 해본 질문들이 쏟아졌다.

조금 있자니 손님인 듯 보이는 남자가 같은 수첩을 내보이며 이야기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이 종이는 이렇고 저 종이는 저렇고 하며 경험담을 늘어놓자 한 여자는 또 필기구와 잉크에 대해 긴 설명을 보탰다. 그들의 수첩은 웬만한 미술관 하나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눈부신 캘리그라피와 그림들로 가득했다. 살면서 수만번 ‘종이’라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한번도 상상한 적 없는 종이들의 세상이었다.

그날 카우프호프백화점 5층 카페로 돌아온 나는 새로 산 속지에 이런 일기를 썼다.

“창문 밖 광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노란 기차가 사람들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긴 놈, 짧은 놈, 그것들이 지나간 기찻길은 어느새 사람들로 메워진다. 3 4 5 6 7 8 9 10 11 12 저 둥그런 것은 대체 무얼까? 20년을 살고서도 난 저 물건의 이름조차 모른다. 보이는 것은 왜 보이는 것일까? 만나는 것은 왜 만나는 것일까? 보고도 못 만나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 것일까….”


법정 스님의 ‘만남’은 우리의 일상 속 작은 만남의 이유뿐만 아니라 소중함도 일깨워주는 것 같다. 오늘 그 말씀을 다시 한번 새기며 내 인생 또 하나의 소중한 만남이었던 <서울&>의 ‘베를린살이’를 맺는다.

글 이재인 재독 프리랜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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