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벚꽃 만발한 교토 ‘철학의 길’에서 사색에 빠지다

⑪ ‘꽃잎이 뗏목처럼’ 흐르는 수로를 따라 둘러보는 고요한 사원의 봄

등록 : 2023-03-1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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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길은 1921년 인근에 사는 화가 부부가 벚나무를 기증하면서 벚꽃길이 가꿔지기 시작했다. 3월 초는 벚꽃이 피기 전이라 매화와 동백꽃이 핀 모습을 볼 수 있다.

물길 따라 걷는 1.8㎞, 300그루 벚꽃길

시민운동이 탄생시킨 ‘일본의 길 100선’

세계유산 긴가쿠지 등 관광명소 여럿

철학자 사색로에서 유래, 이름값 톡톡


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은 절 호넨인

이끼 지붕 산문과 흰모래단, 고요의 멋


“교토 제일의 단풍 명소” 에이칸도에는

‘뒤돌아보는 아미타여래’ 전설도 반겨

봄이 왔으니 봄 이야기를 해야 할 터, 교토에선 어디가 좋을까. 일본인들도 교토만큼 벚꽃이 잘 어울리는 도시가 없다고들 하니, 이방인에겐 벚꽃이 피는 곳이면 다 교토의 봄 같다. 교토의 벚꽃은 3월 말~4월 초순이 절정이다. 그 길목에서 필자가 좋아하는 벚꽃길을 소개해볼까 한다.

교토 동쪽 히가시야마 기슭 아래 ‘데쓰가쿠노미치’(철학의 길)라고 불리는 산책로가 있다. 길 북쪽 끝에는 세계문화유산인 유명한 긴가쿠지(은각사)가 있고, 남쪽에는 가을 단풍이 절경인 에이칸도(영관당)와 난젠지(남선사)가 있다. 길 중간중간에도 호넨인(법연원) 등 고찰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이 명승지군을 하나로 꿰는 실이 ‘철학의 길’이다. 가족이나 연인, 더 좋기는 나 홀로 걷다가 마음이 끌리는 대로 고요한 사찰 경내로 발걸음을 옮기기에 이만큼 좋은 길도 없으리라.

인공수로를 따라 조성된 철학의 길은 사계절 모두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주변에 난젠지 등 교토의 유명한 사원이 즐비해 관광도 겸할 수 있다.

철학의 길은 폭 3m 정도의 수로를 따라 약 1.8㎞ 이어지는 소로다. 1972년 산책로로 조성됐고, 1986년 일본 건설성 선정 ‘일본의 길 100선’에 뽑혔다. 교토 부흥의 신호탄이 된 인공수로 ‘비와코소스이’(연재 1회 참조)가 1912년 완성되면서 생긴 지류를 따라 1921년 300여 그루의 벚나무가 심어졌고, 1960년대 주민들의 열화 같은 환경보호운동에 교토시가 호응한 결과 지금과 같은 길이 탄생했다. 이후 산책로의 명성에 주변 관광 이점이 보태지면서 볼거리 많은 교토에서도 ‘가볼 만한 곳 베스트 10’에 잘 빠지지 않는 ‘국제적인 명소’가 됐다.

고요하고 사색적인 분위기의 길답게 사계절 언제나 걷기에 좋은데 특히 봄에는 만개한 벚꽃이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은다. ‘장관을 이룬다’는 진부한 표현을 그래도 써야 할 때가 있다면, 머리 위로는 꽃비가 날리고 발아래로는 흐르는 물을 따라 꽃잎이 ‘하나이가다’(꽃잎뗏목)가 되어 떠내려가는 광경이 아닐까. 긴 겨울이 끝나고 벚꽃이 피기 전 막간 같은 3월은 그래서 더디게만 흐른다.

길 도중에 있는 고요한 사원 호넨인. 푸른 이끼 지붕 산문과 물을 상징한 흰모래단의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 사원 앞 묘지엔 근대 일본의 명사가 많이 묻혀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계절이 따로 없다. 벚꽃철에는 먼 길을 오느라 수고한 상춘객에게 구경하기 좋은 자리를 내어주고 느긋하게 ‘겐지보타루’(수로에 서식하는 교토 천연기념물 반딧불이)가 반짝이는 여름밤을 예비할 일이다. 고엽이 깔린 만추의 오후나 인적이 끊어진 겨울의 황량한 아침을 좋아한다면 진정한 사색가이다.

철학의 길이라는 이름은 일본 근대철학계의 거두 니시다 기타로(1870~1945)가 명상하며 이 길을 걸은 데서 유래했다. 독일에 ‘칸트의 길’이 있다면, 일본엔 ‘철학의 길’이 있다는 식인데, 관광산업 측면에서는 신의 한 수 같은 작명이다. 사실 철학의 길은 길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것이 없다.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길이 어디 이 길뿐이랴. 주변에 긴가쿠지 같은 명소가 없고, 철학의 길이라는 왠지 있어 보이는 ‘네이밍’이 없었다면 여러 괜찮은 산책로 중 하나였을 것이다.

길 이름의 유래가 된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의 시비. ‘누가 뭐래도 나는 나의 길을 걸어왔다’는 자부가 담겨 있다.

철학의 길 중간쯤에 니시다가 만년(69살)에 썼다는 하이쿠(일본 단시) 한 수가 새겨진 둥근 돌을 만난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 나는 나다. 아무튼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니시다는 불교의 선(禪)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일본 철학을 수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후학들은 비석 설명문에 “선생의 가르침이 철학의 길을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애창되기를” 바랐지만, 필자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고집 센 노철학자의 ‘절대 고독’이 느껴진다.

니시다 선생 노래비에서 긴가쿠지 방향으로 세심교라는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가면 호넨인 절이 나온다. 일본 중세기에 민중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정토종 승려 호넨(法然)이 수행하던 초암에서 유래한 조그만 절인데 묘지를 운영하고 있다. 주변에 유명 사찰이 많지만 필자는 이 호넨인을 좋아한다. 철학의 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원이다.

길 남쪽에 있는 절 에이칸도의 유명한 ‘뒤돌아보는 아미타여래상’. 77㎝의 비교적 작은 목상이다.

동백나무숲에 둘러싸여 어둠침침한 경내의 푸른 이끼 위로 드문드문 햇살이 비쳐드는 사원과 묘지의 적요는 누구라도 ‘도(道)의 나그네’가 된 기분이 들게 한다. 절에 들어서면 이끼 지붕을 얹은 산문과 산문 안 양쪽에 흰 모래를 쌓아 물을 표현한 백사단이 찾아오는 이를 맞이한다. 산문에서 백사단 사이를 지나 절로 들어가는 구조는 수행자에게 정화의 장소에 왔음을 알리는 묵언이다.

호넨인의 묘지에는 근대 일본의 많은 명사가 묻혀 있는데 그중에 근대 일본의 문호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가 있다. 그는 만년에 쓴 소설 <미친 노인의 일기>의 모델이었던 조카며느리 집(그녀는 2003년까지 현재의 애견카페 자리에서 찻집을 운영했다)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려 했을 정도로 이곳을 사랑했다. 철학의 길을 걷다가 잠시 호넨인의 동백숲으로 들어가 다니자키의 무덤(부부 합장)을 한번 찾아보는 것도 여행의 재미일 것이다. 다니자키의 묘비명은 직접 쓴 한 글자다. ‘寂’(적).

절 안 연못가에서 바라본 에이칸도 전경. 가을철 단풍이 곱기로 유명하다.

철학의 길 남쪽 끝에서 약간 더 가면 아름다운 절 에이칸도가 있다. 에이칸도는 두 가지가 유명하다. 하나는 뒤돌아보는 모습의 아미타여래를 새긴 목조각상 ‘미카에리아미다’. 본명이 젠린지(선림사)인 이 절의 7대 주지 에이칸(永觀)이 1082년 어느 날 새벽 염불을 하며 걷는데 아미타여래가 현신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놀란 에이칸이 걸음을 멈추자, 아미타여래가 돌아보며 ‘에이칸, 늦는구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기적’으로 에이칸은 이 절의 중흥조가 됐고, 절의 통칭도 그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두 번째로 유명한 것이 단풍이다. 교토 사람들은 누구나 “가을 단풍은 에이칸도”라고 말한다는데, 과연 단풍나무가 경내에만 3천 그루가 넘는다고 하니 그저 고개를 끄덕여 줄밖에. 단풍철에는 절이 온통 진홍으로 물든다.

철학의 길 북쪽 출발점에 있는 긴가쿠지(세계문화유산) 안으로 들어가는 동백나무 울타리 길.

불당들이 산기슭에 붙인 듯 아슬아슬하게 지어져 있는데, 경사면을 타고 오르는 가료로(와룡랑)라는 회랑을 돌아 오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경내 연못 쪽에서 바라보는 원경은 한 폭의 산수화. 그 원경의 중심을 이루는 다보탑에 올라서면 교토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벚꽃이 피는 봄에는 긴가쿠지에서, 단풍철에는 에이칸도에서 철학의 길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관광철인 만큼 아침 일찍 나서서 입장 개시와 동시에 구경을 시작하는 것이 상책이다. 긴가쿠지는 다음에 긴가쿠지(금각사)를 소개할 때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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