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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안팎으로 한옥 2천여 채 건설
조선물산장려회관 지어 ‘장려운동’ 재개
조선어학회에 2층 양옥 회관 기증
일제에 고문받고 땅 3만 평 뺏겨
“좋은 공간의 힘은 강해”
‘조선의 건축왕’ 정세권이 100년 전 건축한 익선동 한옥마을 모습.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일제강점기 건축가(개발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정세권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데서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기획하는 등 다양한 실험을 했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무부원장은 “정세권은 조선물산장려회관 건물 옥상에 조선 근대 건축물 중에서는 최초로 옥상정원을 만들었다”며 “가족이 옥상정원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잘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공유도시랩과 공공그라운드는 16일 종로구 대학로 공공그라운드에서 ‘건축왕 정세권, 경성을 만들다’ 심포지엄을 열었다. 첫 번째 주제 발표에 나선 김 부원장은 ‘핫플레이스가 된 한옥마을, 익선동은 누가 만들었을까?’를 통해 주택개발 사업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정세권의 삶을 조망했다. 이어 염복규 서울시립대 교수(한국학)가 ‘일제강점기, 누구를 위한 경성 도시계획인가?’에서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고찰, 배수현 공공그라운드 대표의 ‘공간으로 지킬 수 있는 가치, 정세권과 공공그라운드’에 대한 발표가 차례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주택난 해결사로 등장 김 부원장은 이날 오늘날 정세권이 중요한 이유를 “100년 전 새로운 주택 유형의 상품을 개발하고 다양한 계층에 주택을 제공한 것”에서 찾았다.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 30만 명이 채 안 되던 경성부 인구는 20년 뒤인 1930년 35만 명, 1935년 40만 명으로 늘어난 데 이어 1936년 행정구역 확대로 1939년 인구는 80만 명에 육박했다. 인구 급증은 주택난으로 이어졌다. 언론은 1920년대부터 경성의 주택난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1929년 11월9일치 <중외일보>는 “지역은 협착한데 인구는 포화상태, 따라서 주택난이 생기는 것”이라며 주택난의 가장 큰 원인으로 인구 증가를 꼽았다. 정세권은 주택난을 해결하고자 발 벗고 나섰다. 그는 도성 안 삼청동·익선동·가회동 등과 도성 밖 창신동·행당동·신설동·휘경동 등에 한옥 2천여 채를 보급했다. 익선동 166번지 일대는 1929년까지만 해도 조선 25대 왕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후손들이 살았던 사저가 있었다. 휑했던 이곳은 불과 6년 만인 1935년에는 수십 채의 한옥이 빼곡히 들어섰다. 정세권은 경남 고성에서 1919년 상경한 뒤 건설회사 ‘건양사’를 만들어 1920년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20년 가까운 세월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었다. 경기가 좋았던 1919년, 한 칸에 400원까지 했던 집값은 1921년 한 칸에 180원으로 폭락했다. 하지만 정세권은 절대 손해 보지 않았다. “한 칸당 300~400원에 팔 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칸당 250원가량의 밑천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를 180~190원에 팔면 손해가 나는 것이 당연하지요. (나는) 지은 집을 밑지고 판 대신에 뒤를 이어 즉시 한 칸에 170원에 집을 짓고 팔고, 10~20원쯤 남은 돈으로 은행 이자를 갚습니다.” 정세권은 1936년 5월21일치 <매일신보>에 ‘나는 어떻게 성공하였나’를 통해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는데도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김 부원장은 “정세권은 저렴하고 편리한 한옥, 통풍과 일조 고려, 중하층 계층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연부·월부 판매 제도(주택담보 대출)까지 강구했다”며 “이광수와 이극로 등 문인과 지식인층뿐만 아니라 서민 주택을 대량으로 보급해, 다양한 계층에게 주택을 제공했다”고 했다. 김 부원장은 정세권의 이런 노력이 일본인들이 청계천 북쪽 지역인 북촌으로 주거지역을 확장하는 것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경성에 살던 일본인들은 용산과 후암동에 서양식 건물인 ‘문화주택’을 짓고 살았으나, 청계천 북쪽 지역으로 주거지를 조금씩 넓혀갔다. “정세권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청계천 북쪽에 적산 가옥이 더 많아졌을 것이다.” 집 장사해 번 돈으로 ‘독립운동’ 정세권은 주택 보급뿐만 아니라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조선물산장려운동에도 관여했다. 그는 종로구 낙원동 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짓고 조선물산진열관을 개설했다. 조선물산장려운동 기관지 <장산>은 한때 정세권이 비용을 내 발행했다. “경상도 사람 정세권이 내게 와서 이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자고 했다. 일제가 주목하니 위험한 노릇이어서 법을 아는 내가 나서서 법망을 비켜가며 친일을 피하고 징역 안 갈 만큼이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서울대 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최태영 박사는 <대한민국학술원통신>(2005년 7월) ‘광산 이야기와 제2차 물산장려운동’에서 정세권의 요청으로 1929년 다시 물산장려운동을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만해 한용운은 조선물산장려운동 기관지 <장산>에서 “그 어려운 중에서 회관을 짓고 경리를 맡은 정세권씨가 회관을 완성하려고 고심분투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고 썼다.
일제강점기 주택난 해결사로 등장 김 부원장은 이날 오늘날 정세권이 중요한 이유를 “100년 전 새로운 주택 유형의 상품을 개발하고 다양한 계층에 주택을 제공한 것”에서 찾았다.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 30만 명이 채 안 되던 경성부 인구는 20년 뒤인 1930년 35만 명, 1935년 40만 명으로 늘어난 데 이어 1936년 행정구역 확대로 1939년 인구는 80만 명에 육박했다. 인구 급증은 주택난으로 이어졌다. 언론은 1920년대부터 경성의 주택난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1929년 11월9일치 <중외일보>는 “지역은 협착한데 인구는 포화상태, 따라서 주택난이 생기는 것”이라며 주택난의 가장 큰 원인으로 인구 증가를 꼽았다. 정세권은 주택난을 해결하고자 발 벗고 나섰다. 그는 도성 안 삼청동·익선동·가회동 등과 도성 밖 창신동·행당동·신설동·휘경동 등에 한옥 2천여 채를 보급했다. 익선동 166번지 일대는 1929년까지만 해도 조선 25대 왕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후손들이 살았던 사저가 있었다. 휑했던 이곳은 불과 6년 만인 1935년에는 수십 채의 한옥이 빼곡히 들어섰다. 정세권은 경남 고성에서 1919년 상경한 뒤 건설회사 ‘건양사’를 만들어 1920년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20년 가까운 세월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었다. 경기가 좋았던 1919년, 한 칸에 400원까지 했던 집값은 1921년 한 칸에 180원으로 폭락했다. 하지만 정세권은 절대 손해 보지 않았다. “한 칸당 300~400원에 팔 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칸당 250원가량의 밑천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를 180~190원에 팔면 손해가 나는 것이 당연하지요. (나는) 지은 집을 밑지고 판 대신에 뒤를 이어 즉시 한 칸에 170원에 집을 짓고 팔고, 10~20원쯤 남은 돈으로 은행 이자를 갚습니다.” 정세권은 1936년 5월21일치 <매일신보>에 ‘나는 어떻게 성공하였나’를 통해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는데도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김 부원장은 “정세권은 저렴하고 편리한 한옥, 통풍과 일조 고려, 중하층 계층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연부·월부 판매 제도(주택담보 대출)까지 강구했다”며 “이광수와 이극로 등 문인과 지식인층뿐만 아니라 서민 주택을 대량으로 보급해, 다양한 계층에게 주택을 제공했다”고 했다. 김 부원장은 정세권의 이런 노력이 일본인들이 청계천 북쪽 지역인 북촌으로 주거지역을 확장하는 것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경성에 살던 일본인들은 용산과 후암동에 서양식 건물인 ‘문화주택’을 짓고 살았으나, 청계천 북쪽 지역으로 주거지를 조금씩 넓혀갔다. “정세권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청계천 북쪽에 적산 가옥이 더 많아졌을 것이다.” 집 장사해 번 돈으로 ‘독립운동’ 정세권은 주택 보급뿐만 아니라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조선물산장려운동에도 관여했다. 그는 종로구 낙원동 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짓고 조선물산진열관을 개설했다. 조선물산장려운동 기관지 <장산>은 한때 정세권이 비용을 내 발행했다. “경상도 사람 정세권이 내게 와서 이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자고 했다. 일제가 주목하니 위험한 노릇이어서 법을 아는 내가 나서서 법망을 비켜가며 친일을 피하고 징역 안 갈 만큼이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서울대 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최태영 박사는 <대한민국학술원통신>(2005년 7월) ‘광산 이야기와 제2차 물산장려운동’에서 정세권의 요청으로 1929년 다시 물산장려운동을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만해 한용운은 조선물산장려운동 기관지 <장산>에서 “그 어려운 중에서 회관을 짓고 경리를 맡은 정세권씨가 회관을 완성하려고 고심분투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고 썼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무부원장이 16일 종로구 대학로 공공그라운드에서 열린 ‘건축왕 정세권, 경성을 만들다’ 심포지엄에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왼쪽) 정세권의 가족이 조선물산장려회관 옥상정원에서 찍은 사진. 이충신 기자, 김경민 교수 제공
정세권은 영화 <말모이>를 통해 다시 조명된 조선어학회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 조선어학회 회장을 지낸 이극로는 1935년 8월 학회지 <한글>에서 “장산사 사장 정세권씨로부터 서울 화동 129번지 2층 양옥 한 채를 조선어학회 회관으로 감사히 제공받게 되었다. 조선어학회 문패를 붙이고 독립한 호주가 된 것은 창립 이후 처음이다”라며 정세권에게 고마워했다.
그러던 정세권은 조선어학회 탄압 당시 학자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뚝섬에 있던 3만5천여 평의 땅도 빼앗긴다.
“아버지랑 오빠도 같이 잡혀갔죠. 그런데 조선어학회 동지들이 눈앞에서 고문받는 것을 보고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대요. 고문이라도 덜 받게 하려면 일제가 원하는 대로 재산을 줄 수밖에 없었대요.” 정세권의 둘째 딸 정식씨의 2015년 9월 언론 인터뷰 내용으로, 그가 겪은 고초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 부원장은 “민족자본가인 정세권의 일관된 삶의 방향은 실력양성 운동과 맞닿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좋은 공간이 가진 힘은 강하다”며 “인센티브 전략이 없으면 좋은 공간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충신 기자 c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