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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고목들 아직 봄소식 잠잠한데
양화진과 경의선숲길 이야기 넘친다
연둣빛 물오른 수양버들은 낭창대며
‘곧 새로운 잎 틔워낸다’ 발길 붙잡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고목에는 늦게 봄물이 오른다. 서둘러 나간 봄 마중 길에서 만난 고목들은 아직도 겨울이다. 새잎 하나 없는 빈 가지 고목들이 푸른 새잎 대신 봄 같은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느티나무, 공민왕 사당 주변의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그랬다. 경의선 숲길 공원 새창고개에 있는 수양버들 낭창거리는 가지에 옅은 연둣빛 물이 올랐다. 팍팍한 고갯길 넘기 전에 좀 쉬었다 가라고 발길을 붙잡는 것 같았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향나무와 느티나무
1904년 러일전쟁 취재 차 특파원으로 대한제국에 들어온 베델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독립투사 전명운과 장인환이 미국에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사건을 기사로 싣기도 했다. 일본제국 통감부의 감시를 받던 베델은 6개월 근신과 3주 금고형을 받고 중국 상하이에서 금고형을 치렀다. 이후 서울로 돌아왔지만 심신이 쇠약해져 1909년 37살의 나이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을사늑약 체결 전에 고종 황제의 밀사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도움을 호소한 헐버트도 이곳에 묻혔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독립 정당성을 주장했던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묘원을 거닐며 이곳에 묻힌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이야기를 읽는다. 횃불처럼 타오르는 형상의 향나무가 인상적이다. 불꽃처럼 살다 이곳에 묻힌 이들의 영혼을 밝히는 ‘초록 불’ 같다. 묘원을 지키는 200년 넘은 느티나무도 있다. 묘원에서 양화진역사공원 쪽으로 간다. 조선시대 영조 임금 때 한강의 경비를 위해 군대를 주둔시킨 곳이다. 그곳을 지나면 잠두봉이다. 한강으로 머리를 내민 잠두봉이 강과 어울려 멋진 풍경을 만들었다고 한다. 잠두봉 아래 양화나루가 있었다. 조선을 찾은 외국 사신들이 양화나루 뱃놀이를 좋아했다고 한다. 한강 가에 우뚝 솟은 잠두봉과 그 아래 수양버들 가지 낭창거리는 나루의 풍경을 즐기며 뱃놀이했다. 조선 태종 임금 때부터 인조 임금 때까지인 15~17세기에 주로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곳 중 한 곳이 양화나루였다. 잠두봉에 대응하는 선유봉(지금의 선유도공원)이 한강 남쪽에 있었으니, 거대한 물줄기와 마주 보는 두 봉우리가 만들어 내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조선시대에 양화나루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아름다워 ‘양진낙조’라는 이름으로 마포8경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양화나루는 뱃놀이는 물론 삼남지방의 조운선과 한강 유역의 각종 어선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향나무와 느티나무
1904년 러일전쟁 취재 차 특파원으로 대한제국에 들어온 베델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독립투사 전명운과 장인환이 미국에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사건을 기사로 싣기도 했다. 일본제국 통감부의 감시를 받던 베델은 6개월 근신과 3주 금고형을 받고 중국 상하이에서 금고형을 치렀다. 이후 서울로 돌아왔지만 심신이 쇠약해져 1909년 37살의 나이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을사늑약 체결 전에 고종 황제의 밀사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도움을 호소한 헐버트도 이곳에 묻혔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독립 정당성을 주장했던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묘원을 거닐며 이곳에 묻힌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이야기를 읽는다. 횃불처럼 타오르는 형상의 향나무가 인상적이다. 불꽃처럼 살다 이곳에 묻힌 이들의 영혼을 밝히는 ‘초록 불’ 같다. 묘원을 지키는 200년 넘은 느티나무도 있다. 묘원에서 양화진역사공원 쪽으로 간다. 조선시대 영조 임금 때 한강의 경비를 위해 군대를 주둔시킨 곳이다. 그곳을 지나면 잠두봉이다. 한강으로 머리를 내민 잠두봉이 강과 어울려 멋진 풍경을 만들었다고 한다. 잠두봉 아래 양화나루가 있었다. 조선을 찾은 외국 사신들이 양화나루 뱃놀이를 좋아했다고 한다. 한강 가에 우뚝 솟은 잠두봉과 그 아래 수양버들 가지 낭창거리는 나루의 풍경을 즐기며 뱃놀이했다. 조선 태종 임금 때부터 인조 임금 때까지인 15~17세기에 주로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곳 중 한 곳이 양화나루였다. 잠두봉에 대응하는 선유봉(지금의 선유도공원)이 한강 남쪽에 있었으니, 거대한 물줄기와 마주 보는 두 봉우리가 만들어 내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조선시대에 양화나루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아름다워 ‘양진낙조’라는 이름으로 마포8경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양화나루는 뱃놀이는 물론 삼남지방의 조운선과 한강 유역의 각종 어선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공민왕 사당 마당에 있는 느티나무 고목 두 그루.
공민왕 사당의 나무들
고려 공민왕 사당 주변 커다란 회화나무 세 그루와 느티나무 두 그루가 가까운 곳에 모여 있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공민왕 사당 앞 아파트 단지 안에 333년 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할아버지처럼 굽어보고 있다. 공민왕 사당 정문 앞에 광흥창 터를 알리는 푯돌이 보인다. 고려시대에 생긴 광흥창은 관리들에게 지급하는 녹봉에 관한 일을 맡아 하던 관청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에 광흥창을 두었다. 광흥창 터이자 공민왕 사당 정문 양쪽 옆에 있는 233년 된 회화나무 두 그루가 사당을 지키는 장승 같다. 사당 마당에는 273년과 261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공민왕 사당 옆 계단을 올라간다. 마포구에서 ‘마포 걷고 싶은 길’이라는 이름을 붙인 와우산 산길로 연결된다. 중앙하이츠아파트 뒤 숲에 273년 된 느티나무가 숨어 있다. 그 나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밤섬 부군당이 있다.
조선시대에 배를 만드는 사람들이 한강 밤섬에 정착했다. 당시 약 130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곳에 부군당을 짓고 마을과 사람의 안녕을 빌고, 한강을 오가는 배들의 안전 운항을 기원했다고 한다. 밤섬이 폭파되면서 섬에 살던 사람들은 와우산 중턱으로 이주했고, 부군당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와우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로 접어든다. 와우산은 무악산 지맥이 남쪽으로 이어지는 곳에 자리했다. 소가 누운 형국이라 해서 와우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홍익대학교 뒷산이자 주변 마을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는 뒷동산이다. 철조망으로 만든 문을 지나 와우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해발 100m를 갓 넘긴 낮은 산이다.
와우산을 넘어 경의중앙선 홍대입구역 6번 출구 앞에 도착했다. 이곳이 옛 경의선 철길에 만든 경의선 숲길 공원 중 경의선 책거리가 시작되는 곳이다. 공덕역 방향으로 걷는다.
경의선 철길과 마을 옛 사진.
팍팍한 다리 쉬어가던 새창고개 수양버들
자산홍, 느티나무, 청단풍, 칠엽수 등 아직은 빈 가지만 남은 나무들 사이로 사람들이 산책을 즐긴다.
‘텍스트의 숲’이라는 이름의 조형물에 눈길이 머문다. 스테인리스 스틸 등으로 만든 이 조형물은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스며드는 숲을 형상화했다. 마포구 추천 도서 100권의 본문에 나오는 단어가 나뭇잎이 되어 햇볕을 받고 있다.
서강하늘다리 못미처 길가에 노란 꽃이 피었다. 개나리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아니다. 꽃 이름 검색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해보니 영춘화일 확률이 99%란다. 무채색 도시에서 만난 작은 샛노란 꽃이 반가웠다.
서강하늘다리 부근 에 피어난 영춘화.
공덕역으로 가는 길, 높이 솟은 아파트 단지 건물 앞 지붕 낮은 낡은 기와집이 서글프다. 지붕 위에 앉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꿈쩍 않고 아파트 단지를 바라본다.
철길 위를 걷는 아이 그 옆에서 철길에 귀를 대고 있는 아이의 조형물이 기찻길 옆 오막살이를 생각나게 한다. 길 가운데 한 줄로 선 소나무가 푸르다. 서강대 앞 경의선 숲길 공원 구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길갓집 담벼락 앞 의자에 앉은 할머니들 옆에 옛 경의선 기찻길과 마을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 있다. 친절한 할머니들은 사진 속 기찻길과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사람들이 착하고 좋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땅속으로 새 기찻길을 내기 위해 할머니들도 서명했다며 환하게 웃는다.
공덕역 10번 출구를 지나면 경의선 숲길 커뮤니티센터다. 이곳부터 이어지는 고개 이름이 새창고개다.
작은 쉼터를 지나면 수양버들이 나온다. 여린 연둣빛 물이 오르려고 하는 수양버들 가지가 바람에 넘실거린다. 고개를 넘기 전에 팍팍한 다리 쉬어가라는 손짓 같았다. 수양버들 가지 아래 앉았다.
새창고개를 넘기 전에 만난 수양버들.
새창고개는 마포구 도화동과 용산구 효창동을 잇는 고갯길이다. 조선시대 선혜청의 창고인 만리창을 고갯길 언저리에 지었는데, 당시 새로 지은 창고라고 해서 새창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창고가 있는 마을은 새창마을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새창고개에는 키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심심하게 서 있다. 고갯마루 위에는 백범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놓였다. 백범교 서쪽이 마포구이고 동쪽이 용산구다.
새창고개 고갯마루.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