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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촌한강공원 둔치 미루나무길.
강길 미루나무, 신작로 추억 불러오고
마을숲은 마실 기억 떠오르게 하는데
달동네 뒷동산도 옛 향기 잃지 않았다
그런데 숲길 벗어나면 도시, 참 낯설다
한강대교에서 동작대교 사이 이촌한강공원에 2㎞ 정도 되는 ‘미루나무길’이 있다. 두 줄로 이어지는 미루나무 흙길을 걸으며 흙먼지 날리던 1970년대 시골 신작로를 생각했다. 은평구 진관동 옛 제각말 숲과 잿말 숲을 거닐었다. 잿말은 지금의 은평한옥마을이다. 마을 안에 작은 숲이 있고 마을 옆에 계곡과 숲이 있다. 상도동과 봉천동의 경계가 만나는 상도근린공원(국사봉)은 마을 뒷동산이다. 달동네 뒷동산의 추억이 떠올랐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한강대교부터 동작대교까지 한강 가 미루나무길을 걷다
용산역에 도착해서 한강대교 북단까지 걷기로 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빌딩들이 용산역 광장을 에워쌌다. 파란 하늘 맑은 햇살이 빌딩숲 유리창마다 반짝였다. 한강대로21가길을 따라 한강 쪽으로 걸었다. 낡은 집과 골목은 추억으로 가는 통로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지금도 기차와 전철이 다니는 철길이 남아 있었다. 종소리가 울리고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간다. 기차가 다 지나가고 나서 차단기가 올라가고 사람들과 자동차가 건널목을 건넌다. 용산역 광장에서 800~900m 거리를 걸어서 현재에서 70~80년대에 도착한 것이다. 추억으로 가는 길은 한강대교 북단 한강 둔치로 이어졌다. 차가 다니는 길, 자전거길, 걷는 길 사이에 미루나무가 두 줄로 늘어선 미루나무길도 있었다. 미루나무길로 들어서면서 옛 생각을 했다. 70년대 시골 신작로 가로수가 미루나무였다. 여름 땡볕 아래 곧추선 미루나무 그림자가 송곳처럼 신작로에 박혔다. 매미 소리가 열기를 뚫고 울려퍼질 때 흙먼지 날리는 미루나무길에는 질경이가 자랐다. 갈매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물비린내가 담겼다. 멱감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오후 두 시의 땡볕 아래 짱짱했다. 한강 둔치 미루나무길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몰랐다. 저 먼 길 끝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아른거린다. 하얀 구름 떠 있어 하늘이 더 파랬다. 미루나무길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신작로의 추억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얼굴이 편해 보였다. 뒷자리에 작은 짐받이가 있는 낡은 자전거를 끌고 가는 아저씨가 있어 미루나무길의 추억이 더 짙어졌다.
한강대교부터 동작대교까지 한강 가 미루나무길을 걷다
용산역에 도착해서 한강대교 북단까지 걷기로 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빌딩들이 용산역 광장을 에워쌌다. 파란 하늘 맑은 햇살이 빌딩숲 유리창마다 반짝였다. 한강대로21가길을 따라 한강 쪽으로 걸었다. 낡은 집과 골목은 추억으로 가는 통로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지금도 기차와 전철이 다니는 철길이 남아 있었다. 종소리가 울리고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간다. 기차가 다 지나가고 나서 차단기가 올라가고 사람들과 자동차가 건널목을 건넌다. 용산역 광장에서 800~900m 거리를 걸어서 현재에서 70~80년대에 도착한 것이다. 추억으로 가는 길은 한강대교 북단 한강 둔치로 이어졌다. 차가 다니는 길, 자전거길, 걷는 길 사이에 미루나무가 두 줄로 늘어선 미루나무길도 있었다. 미루나무길로 들어서면서 옛 생각을 했다. 70년대 시골 신작로 가로수가 미루나무였다. 여름 땡볕 아래 곧추선 미루나무 그림자가 송곳처럼 신작로에 박혔다. 매미 소리가 열기를 뚫고 울려퍼질 때 흙먼지 날리는 미루나무길에는 질경이가 자랐다. 갈매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물비린내가 담겼다. 멱감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오후 두 시의 땡볕 아래 짱짱했다. 한강 둔치 미루나무길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몰랐다. 저 먼 길 끝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아른거린다. 하얀 구름 떠 있어 하늘이 더 파랬다. 미루나무길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신작로의 추억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얼굴이 편해 보였다. 뒷자리에 작은 짐받이가 있는 낡은 자전거를 끌고 가는 아저씨가 있어 미루나무길의 추억이 더 짙어졌다.
동작대교를 건너면서 본 풍경. 강가의 버드나무숲이 보기 좋다.
잠시 미루나무길을 벗어나 한강이 보이는 길을 걸었다. 미루나무길 밖에서 미루나무길을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강에 물결이 일었고 물비린내가 바람에 실려 왔다. 물 건너편, 서달산 줄기의 한 맥이 한강에 닿기 바로 전 언덕에 있는 효사정이 보였다. 효사정은 조선시대 초기에 벼슬을 지낸 노한의 별서였다. 그 터에 요즘 지은 효사정 한옥이 한강을 굽어보고 있었다.
다시 미루나무길로 들어갔다. 동작대교를 만나 다리 위로 올라갔다. 서쪽 하늘이 울긋불긋해진다. 노을카페 옥상에 올라 노을을 보며 옛날과 오늘의 미루나무길을 생각했다.
은평구 옛 제각말과 잿말의 마을숲을 돌아보다
마을숲이 있던 옛 농촌 시골마을의 풍경을 은평구 진관동에서 만났다. 진관동 제각말과 잿말을 돌아보며 기와 얹은 돌담 골목을 지나 마실 다니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른바 ‘마실길’의 출발 장소를 화의군 이영 묘역으로 정했다. 화의군은 조선시대 세종 임금의 여섯째 아들이다. 아버지를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했다고 알려졌다. 세조가 임금 자리에 올랐을 때 단종 복위에 연루돼 전라도 금산으로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작은 연못과 홍살문을 지나면 사당이다. 사당 뒤 너른 풀밭 끝 소나무숲에 화의군의 묘가 있다.
연서로로 끊긴 산줄기를 잇는, 하나고등학교 남쪽에 있는 생태통로 부근에 제각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 부근에 들어선 은평뉴타운제각말아파트라는 이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제각말은 조선시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철종 임금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의 묘를 이말산에 조성하면서 만든 제각(재실)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화의군 이영 묘역을 뒤로하고 연서로48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첫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 걸었다. 그곳에서 숲으로 들어갔다. 멧돼지가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게 철조망을 치고 문을 만들었는데, 그 문을 열고 나갔다. 하늘이 열렸다. 풀밭 오솔길 양쪽 옆에 돌무지가 여러 개 보였다. 그 길은 진관근린공원(이말산)으로 연결된다. 왔던 길을 되짚어 걸었다. 숲 밖으로 나와 연서로 50길로 걸었다. 그 길에 제각말문화공원 안내판이 있었다. 안내판 뒤 계단이 놓인 오르막길로 올라갔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용출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를 지나면 길은 은평역사한옥박물관으로 이어진다. 전망대에서 은평한옥마을과 북한산이 어울린 풍경을 보았다. 넘실대는 기와지붕의 곡선과 북한산 능선이 닮았다.
은평한옥마을과 북한산.
은평한옥마을 자리에 있었던 옛 마을 이름이 잿말이다. 제각말에서 재(고개)를 넘으면 잿말이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잿말이 됐다고 한다. 영산군 이전 묘역의 재실이 있었다고 해서 잿말이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옥마을 한쪽에 느티나무 고목 네 그루가 습지와 함께 작은 숲을 이루었다. 습지에 놓인 데크길로 걸을 수 있다. 마을숲에서 나와 진관사 쪽으로 걷다보면 왼쪽에 마실길근린공원이 나온다. 작은 은행나무숲과 함께 계곡이 있어 마을 사람들은 물론 인근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여기까지가 그야말로 마실길이다.
상도동과 봉천동 뒷동산 숲길
달동네 뒷동산은 고유의 향기가 있다. 추억의 그 향기를 동작구 상도동과 관악구 봉천동이 경계를 나눈 상도근린공원(국사봉)에서 느꼈다.
양녕로20길이 국사봉을 갈라놓았다. 길 서편 산에 국사봉 꼭대기가 있다. 동편 숲길 중 하나가 봉천고개(살피재)로 이어진다. 그 가운데 있는 양녕대군 묘역인 지덕사에서 출발해서 봉천고개(살피재)로 나오는 상도근린공원(국사봉) 숲길을 걸었다.
상도근린공원(국사봉) 구암정.
지덕사를 찾을 때마다 가슴을 뛰게 하는 게 하나 있다. 양녕대군이 초서로 쓴 ‘후적벽부’를 새긴 비석이 그것이다. 목판에 새겨진 양녕대군의 친필을 커다란 오석에 옮겨 새겼다. 이날도 그 앞에 한참 서서 바라보았다.
지덕사를 나와 국사봉중학교를 찾아갔다. 학교를 지나 고갯마루 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길 왼쪽에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계단에 다 올라서면 숲속의 넓은 길이 이어진다. 동네 뒷동산이라 산이 유순하다. 숲에 울리는 새소리가 청명하다. 가끔 새가 숲길에 내려와 앉기도 한다.
숲길을 걸으며 옛날 생각을 했다. Y자로 갈라진 나뭇가지를 다듬고 노란 기저귀 고무줄을 달아 새총을 만들었다. 주머니 가득 공기돌만한 돌멩이를 넣고 친구들과 함께 뒷동산을 누볐다. 새를 잡는다고는 했지만 새를 잡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둑어둑해질 때 산에서 내려와 내일 만날 것을 약속하며 각자 집으로 향했다. 달동네 아이들은 그렇게 자랐다. 귀신 나온다는 당산 꼭대기 당산나무가 조금 무서웠을 뿐이지 뒷동산 숲은 초등학생 우리들에게 놀이터였다. 해 긴 여름날 저녁을 일찍 먹고 아버지 손을 잡고 올랐던 곳도 그 뒷동산이었다. 그때 그 뒷동산 풀향기, 흙냄새는 지금도 위안이다.
구암고등학교 담장에 장미꽃이 피었다. 계단에 떨어진 꽃잎마저 숲에서 빛난다. 산 아랫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쉬는 숲속의 작은 숲, 성현드림숲을 지나 옛 달동네의 추억을 소환하는 옛집을 몇 채 보았다. 낡은 것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살피재고개가 400m 남았다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숲을 통과하는 마지막 관문 같은 숲길을 만나게 된다. 차들이 질주하는 봉천고개(살피재) 고갯마루 넓은 도로가 낯설었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