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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안양천 야생화 안타까워”…정년 뒤 20년간 사진 기록

‘안양천 지킴이’ 야생화 사진작가 정양진씨

등록 : 2022-08-2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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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사진작가 정양진씨가 19일 자신의 집 거실에서 그동안 전시했던 사진 일부를 바닥에 펼쳐 보여줬다. 정씨가 들고 있는 사진 속 야생화는 안양천에서 찍은 애기똥풀이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요즘 이틀에 한 번꼴 안양천으로 출사

층꽃나무 등 사라진 꽃 생각 “아쉬움”

“확산중 생태교란 식물 빨리 제거해야”

백두산 포함, 전국 돌며 7500점 촬영도

“야생화를 찍기 위해 사진을 배웠죠. 덕분에 남들보다 건강하게 삽니다.”

구로구 개봉동에 사는 야생화 사진작가 정양진씨는 여든 살의 나이지만 아직도 60대 못지않게 건강하다. 정씨는 19일 “출사를 가면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젊게 사냐’고 묻는다”며 “그때마다 야생화를 만나서라 답한다”고 웃었다.

정씨는 요즘 이틀에 한 번꼴로 가까운 안양천에 나간다. 하지만 생태계 교란 식물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10여 년 전 구일역 밑 배수펌프장 주변에서 가시박이 수양버드나무를 뒤덮고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 버드나무는 고사했어요.”


정씨는 안양천 녹지에 생태계 교란 식물인 가시박과 단풍잎돼지풀 등 외래식물이 번성해 토종식물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고 했다. 그는 몇 년 전 태백시가 생태계 교란 식물이 태백산 등산로에 넓게 퍼져 있는 걸 발견하고 제거에 나섰으나, 제거하는 개체수보다 늘어나는 개체수가 더 많아 포기한 사례도 있다고 했다.

“안양천뿐만 아니라 한강 지천에 자생하는 생태계 교란 식물인 가시박과 단풍잎돼지풀을 하루빨리 제거해야 해요.”

정씨는 “구로구, 양천구, 영등포구를 흐르는 양쪽 안양천 변에는 단풍잎돼지풀이 터를 잡기 시작했다”며 “지금 뽑아 없애야지 그대로 놔두면 돈과 인력이 더 많이 들고 토종식물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환경부는 3년마다 생태계 등에 미치는 위해가 큰 생물을 ‘생태계 교란 생물’로 지정하는데, 2021년 12월 지정한 생태계 교란 식물은 돼지풀, 단풍잎돼지풀, 가시박, 환삼덩굴 등 모두 16종이다.

정씨는 전국을 누비며 총 7500여 점의 야생화 사진을 찍었다. 2018년 7월과 2019년 6월에는 백두산에 올라 천지 주변과 장백폭포, 금강대협곡, 습지 등을 탐사했다. 백두산에서 총 153종 806점의 야생화를 카메라에 담았다. 정씨는 티스토리 개인블로그에 ‘정양진의 야생화 세계'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익 추구 목적이 아니라면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고 했다.

정씨는 그동안 야생화 사진 전시회를 세 번 열었다. “서울시 장애인치과병원과 함께 전시회를 연 것이 가장 기억에 남죠.” 서울시 장애인치과병원은 2016년 10월 환자들의 힐링을 위해 사진 전시회를 열었다. 장애가 있어 쉽게 산에 오르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사진으로나마 아름다운 야생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정씨는 “산에 쉽게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냐”며 “내가 찍은 사진이 누군가에게 큰 위안이 된다는 게 매우 기뻤다”고 했다.

“꽃을 좋아하는 유전자가 몸 안에 있어요.” 전남 보성군이 고향인 정씨는 증조부가 살았던 고택 옆의 넓은 모란꽃밭이 지금도 있다고 했다. 평소 정씨의 부친은 증조부대부터 내려온 꽃밭이니 대대로 잘 가꾸라고 아들에게 당부하곤 했다. 정씨는 “그렇게 가꾼 모란꽃을 집집마다 나눠줘 지금은 마을에서 모란꽃이 없는 집이 없다”며 “어릴 때부터 꽃을 아끼는 마음이 몸에 배어 자연스럽게 야생화를 찾고 사진도 찍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정씨는 1970년대부터 야생화 사진을 찍었지만, 안양천 야생화 사진을 제대로 찍기 시작한 것은 20년 전 정년퇴직 이후부터다. 정씨는 자신이 찍은 안양천 야생화 중에서 지금은 볼 수 없는 게 몇 있다고 했다. “꽃이 층층이 피어난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층꽃나무와 닭의장풀 보라색 꽃은 볼 수 있으나 흰색 꽃인 덩굴닭의장풀은 보기 힘들어요.” 정씨는 “당시 꽃씨를 받아서 심었다면 지금도 볼 수 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야생화로 쥐방울덩굴꽃을 꼽았다. 야생화 사진작가들이 제일 찍고 싶어 하는 꽃 중 하나라고 했다. 쥐방울덩굴은 희귀식물로 멸종 위험이 있는 꼬리명주나비와 사향제비나비의 먹이다. “요즘 보기가 힘들어요. 나도 5년 전에 한 번 봤죠.” 정씨는 “지난해 찾아가서 촬영한 뒤 며칠 뒤 다시 갔더니 예초 작업을 하는 통에 모두 베이고 없더라”며 안타까워했다.

1960년대 말 서울에 올라와 공무원 생활을 한 정씨는 구로구에서 50년 넘게 살고 있다. “아파트 층간 소음 문제가 심각했어요.” 정씨는 2013년 지금 사는 개봉동 아파트 주민과 함께 한마을들꽃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나무 아래 그늘진 곳에서도 잘 자라는 야생화를 화단에 심어보자고 했죠. 모임에서 서로 얼굴을 알고 친하게 지내면 층간 소음 문제도 줄어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정씨는 “모임을 하기 전에는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들조차 인사도 잘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인사도 잘하고 층간 소음도 많이 줄었다”고 했다.

“내년 봄부터는 안양천의 발원지인 경기도 의왕에서부터 광명, 금천, 구로, 영등포를 거쳐 한강과 합류하는 강서까지 안양천의 사계를 담아보고 싶습니다.” 정씨는 안양천에서 찍은 야생화, 조류, 풍경 등 사진을 모아 전시회를 하는 게 목표다. 이와 함께 어린이들에게 야생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야생화 관련 생태교육도 하고 싶다고 했다.

정씨는 “언젠가는 고향 고택 뒤에 전시관을 만들어 제가 찍은 야생화 사진을 전시하는 게 꿈”이라며 “주위 관광 명소를 둘러보며 하나의 관광 코스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충신 선임기자 c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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