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비극의 근·현대사 110년을 기억하자

일본·미국 대물림하며 금단의 땅으로, 기지 곳곳엔 식민과 냉전의 아픈 역사 유적 여전

등록 : 2016-10-06 15:35 수정 : 2016-10-0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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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용산기지에 세운 보병 78연대와 79연대의 병사 모습(왼쪽). 지금의 녹사평역 일대에서 바라본 1920년 이후의 병영 전경이다. 왼쪽의 큰길은 오늘날 삼각지역에서 녹사평역 사이의 이태원로이다. 오른쪽은 남산에서 바라본 현재의 용산 미군기지 막사 모습이다. 향토사학가 김현수 제공,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지하철 1호선 남영역을 지나가다 보면 길게 이어진 빈 광고판이 눈에 띈다. 눈썰미가 좋다면 광고판 뒤로 창고 건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용산 미군기지의 일부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용산에 미군기지가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주둔한 지가 벌써 6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산에 미군보다 먼저 일본군이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가 반환되긴 했지만, 아직도 미군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공간과 시설들은 일본군이 먼저 자리 잡고 만들어놨던 것이다.

보상도 없이 어느 날 강제 수용

일본이 용산에 발을 디딘 것은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던 20세기 초반이었다. 1904년, 한반도의 운명을 놓고 러시아와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와 한일의정서를 체결한다. 의정서에는 일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지역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러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군사적 필요성이라는 명목으로 진해를 비롯한 전국 여러 곳의 토지를 강탈했다. 그 가운데에는 용산도 포함돼 있었다. 국내외의 항의를 받고 일부를 반환하긴 했지만, 무려 100만 평이 넘는 땅이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땅에 살던 우리 백성들은 하루아침에 집과 토지, 그리고 소중한 조상의 무덤을 잃어야만 했다. 토지와 집에 대한 보상 책임은 대한제국 정부에 떠넘겨졌다.

일본이 용산을 탐낸 이유는 지리적 요건 때문이었다. 한성 남쪽의 넓은 개활지(나무나 숲 등 엄폐물 없이 탁 트인 땅)라서 군대가 주둔하기 쉽고, 경부선이 지나가는 지역이라 보급과 이동이 편리했다. 철도뿐만 아니라 한강을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이런 지리적 이점 덕분에 용산 지역은 홍수가 자주 나는 곳인데도 외국군의 주둔지로 이용돼왔다. 일본군이 자리 잡기 전에 이미 청나라군이 머문 적이 있다.

용산을 점거한 일본군은 몇 차례에 걸쳐 막사와 보급창들을 만들었다.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지휘하는 총사령부도 들어섰다. 용산의 일본군 군사기지 건설은 크게 2단계에 걸쳐 진행됐다. 우선 1905년부터 1913년까지 1단계 공사가 진행되면서 총독 관저를 비롯해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들어선다. 2년 뒤인 1915년에 한반도에 2개 사단을 주둔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용산에 추가 공사가 진행된다. 1922년 2단계 공사가 완료되면서 대략 군사기지로서 용산의 모습이 완성됐다. 제20사단이 용산에 배치되면서 병사들이 머무는 보병영과 장교 숙소 등이 건설됐고, 사단에 배속된 기병 부대와 포병·공병 부대의 막사도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조선인 마을을 강제로 없애고 이주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대륙 침략의 중간 보급기지

용산에 주둔하는 제20사단의 제78, 79연대는 유사시 경성을 장악하고 열차를 이용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서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 다른 사단인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면서 국경 지역을 수비했다. 한마디로 한반도를 겨눈 비수가 된 셈이다. 당시 일본이 상비군으로 보유한 사단이 17개 사단이었는데, 그 가운데 2개 사단을 한반도에 주둔시켰다. 그것은 일본이 한반도를 영원히 장악하는 것은 물론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만들기 위한 포석이었다.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에게는 특이한 임무가 하나 주어졌다. 바로 정오를 알리는 대포, 즉 오포를 발사하는 임무가 포병대에 주어진 것이다. 시계가 귀했던 시절이라 정오의 대포 소리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이 오포 발사 임무는 1922년, 일본군이 경성부에 인계하면서 막을 내렸다. 1년 동안은 경성부의 협조 요청을 받아 포병대에서 출장을 나가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당시 신문에 오포의 운영 문제가 여러 차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상당히 큰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1925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쓰였던 비행기를 도입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항공연대가 편성되고, 용산의 기지에는 비행기를 공격할 수 있는 고사포대를 설치하기로 한다. 1925년은 을축년 대홍수가 난 해이기도 하다. 특히 한강과 붙어 있는 용산 지역은 큰 피해를 보았는데, 이때 용산의 일본군 사령부는 피난민 수용소로 쓰이기도 했다. 1931년에는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에 참가하기 위해 용산에 주둔 중인 일본군이 출동하기도 했다. 용산의 일본군 군사기지는 한반도와 한국인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한발 더 나아가 대륙 침략의 중간 보급기지 구실을 했다. 태평양전쟁이 터지고 조선인 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할 때에는 징병검사 장소로 쓰였다.

이런 상황은 1945년 8월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바뀌게 된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한반도에 진입한 미군은 일본군 시설을 그대로 접수해 썼다. 가장 규모가 크고 잘 만들어진 용산의 일본군 기지 역시 미군이 접수했다. 하지만 미군은 한반도에 오랫동안 있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1948년, 소수의 군사고문단을 제외하고 철수한다.

미군 주둔하며 인근에는 환락가가

미군이 빠져나간 용산의 일본군 기지는 한국군이 쓰게 된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고 미군이 다시 주둔하게 될 필요성이 생기자 용산은 다시 미군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한국전쟁이 끝나는 1953년부터 미군이 다시 용산에 주둔했다. 미군이 돌아온 용산 일대에는 환락가가 들어섰다. ‘흑장미’라 일렀던 성매매 여성들이 이곳에서 미군을 상대했다. 용산 기지 안에 있는 미8군 클럽은 가수들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했다. 용산으로 돌아온 미군은 일본군 막사와 장교 숙소 등을 용도에 맞춰 조금씩 개조한 채 지금까지 쓰고 있다. 군사시설이기 때문에 반세기 넘게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돼왔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재개발과 재건축의 광풍을 피해, 지나온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곳은 레스토랑인 ‘하텔하우스’다. 언덕 위에 있는 하텔하우스는 1951년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 제2보병사단 소속의 하텔 중위를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하텔하우스 이전에는 일본군 제20사단 사단장 관사였다. 내부는 벽난로를 비롯해 완벽한 서양식 주택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지붕의 일본식 기와에는 국화 문양이 남아 있다. 하텔하우스의 주차장 한쪽 구석에는 사단장 관사를 지키던 경비초소도 덩그러니 남아 있다.

붉은 벽돌과 대리석으로 만든 일본군 막사인 보병영 역시 아직 그대로다. 2층의 박공에 붙어 있던 일본군 상징인 노란 별이 떨어져나간 흔적이 역력하게 보인다. 먼저 세운 제78연대 보병영과 다음에 지은 제79연대 보병영은 모습이 조금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제79연대 보병영에 굴뚝이 더 많다는 점이다. 일본과는 다른 한반도의 추위를 견디기 위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침략이 정교해졌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화강암으로 기초를 놓고 붉은 벽돌을 높이 쌓아올린 일본군 위수감옥은 1909년에 지었다. 일본군 죄수들을 가두기 위해 만든 이곳에서는 1911년 의병장 강기동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 이후에는 한국군이 접수해 썼는데, 백범 김구를 암살한 육군 소위 안두희가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감금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 시설은 미군이 병원 시설로 쓴다. 용도에 맞게 담장을 허물어서 새로운 출입구를 만들어놨지만 대부분의 건물은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 (JUSMAG-K)이 쓰고 있는 일본군 장교 숙소 역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2층 건물 전체를 페인트로 새로 칠하면서 원래의 색깔은 잃어버렸지만, 건물 자체는 별다른 변화를 겪지 않았다. 이곳은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 대표단 숙소로 쓰이기도 했다. 일본군 장교 숙소였다가 본의 아니게 현대사에 큰 흔적을 남겨놓게 된 것이다.

1908년에 완성된 병기지창은 일본군 군수 물자를 보관하던 곳이다. 일본군 시설 중에서도 비교적 초창기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더 고전적인 느낌을 준다. 특히 창문 사이에 튀어나온 부벽들은 일본이 도입한 서양의 건축 기법이 발달되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비극의 근현대사 마무리 기회

용산에 있는 미군 시설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역시 드래곤힐 호텔이다. 한때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면 숙소로 쓰기도 했다. 뒤쪽으로 가면 한국식 기와 담장이 있는 정원과 만날 수 있다.

용산 미군기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우편번호와 전화를 사용한다. 미국에서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음식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으며, 운동장을 비롯해서 식당과 극장 같은 편의시설들이 있어서 안에서 생활이 가능하다. 10만 평이 넘는 크기의 골프장까지 있었다. 미국 대학교의 분교도 있기 때문에 미국에 가지 않고도 졸업장을 따는 게 가능하다. 한마디로 ‘한국 속의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얼마 뒤면 미군이 용산을 떠날 것이다. 일본이 1905년 자리를 잡은 이래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우리와 다시 만나게 된다. 그 안에는 일본이 수십 년에 걸쳐 만들고 미국이 이어서 사용해온 역사의 기억이 남겨져 있다. 이 기억들을 어떻게 가꾸고 보존하느냐에 따라 비극의 근현대사를 마무리 지을 기회가 오게 된다.

<일제의 흔적을 걷다> 필자 정명섭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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