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소식

조선 궁녀 흔적 느끼며 걷는 숲길 2.7㎞

은평구 3월부터 11월까지 ‘이말산 여성테마길’ 운영

등록 : 2023-03-30 15:14 수정 : 2023-03-30 15:16

크게 작게

양혜진 해설사가 25일 은평구 ‘이말산 여성테마길’에서 조선시대 궁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말리꽃 많아 이름 붙여진 이말산에서

2009년 상궁 임씨 묘와 묘비 확인

‘여성친화도시’ 일환으로 조성·운영

“해설사 양성과 함께 더 활성화할 것”

25일 토요일 오전 10시, 은평구 불광동 수리초등학교 6학년 학생 6명이 ‘이말산 여성테마길'을 탐방하기 위해 지하철 구파발역 2번 출구 앞에 모였다. 이말산은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높이 132.7m, 면적 98만3791㎡의 산으로 전체가 진관근린공원이다. 이말산 여성테마길은 2.7㎞ 거리로 걸어서 약 2시간 걸린다. 양혜진 해설사는 “이말산은 말리꽃(재스민의 일종)이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이말산과 구파발의 유래에 대한 설명을 듣고 탐방에 나섰다. “나무를 잘라도 안 되고, 돌을 캐도 안 되고, 무덤을 만들어도 안 됐어요.” 양 해설사는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서 해서는 안 되는 3가지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한양도성에서 10리 이내에는 무덤을 쓸 수 없었다. 한양 도성에서 10리 밖에 있는 이말산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무덤 1700여 기가 남아 있다. 이말산에 무덤이 많은 이유는 서오릉과 왕실 사찰인 수국사가 가까이 있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양 해설사는 “이말산에는 사대부 묘를 비롯해 중인, 내시와 궁녀 등 다양한 계층의 무덤이 있다”며 “역사적 가치가 높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숲속 박물관”이라고 했다.

가는 길에 ‘우봉 김씨’의 묘가 모여 있는 묘역을 지났다. 양 해설사는 잠시 멈춰서 조선인 역관으로 최초로 해외 일주를 한 김득련에 대해 소개했다.


“힘들어요.”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는 한 초등학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안 힘들다고 했는데….” 그래도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어느덧 궁녀에 대해 소개하는 표지판이 있는 곳까지 왔다. 은평구가 궁녀를 주제로 조성한 이말산 여성테마길이다. 은평구는 2015년 12월 여성친화도시로 지정돼 다양한 분야에서 양성평등 사회를 만드는 노력을 하고 있다. 지난해 조선시대 왕실의 의식주를 책임졌던 ‘전문직 여성’ 궁녀의 이야기를 담아 여성테마길을 만들었다.

“오늘 주제는 궁녀입니다. 궁녀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일을 했는지 알아보도록 할게요.” 양 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조선시대 궁녀는 보통 10살 전후로 궁궐에 들어왔다. 섣달 그믐날 밤에 신고식을 치렀다. 환관(내시)들이 마당에 한 줄로 선 궁녀들의 입에 횃불로 입을 지지는 시늉을 하며 ‘쥐부리 글려, 쥐부리 지져’라고 위협하는 무서운 신고식을 치렀다. 양 해설사는 “어린 궁녀들에게 궁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입조심’을 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명부에서 5~6품 품계를 받은 궁녀를 상궁, 그 아래 품계를 받은 궁녀를 나인이라고 했다. 궁녀들은 월봉(월급)으로 쌀, 콩, 북어를 받았다. 양 해설사는 “명절이나 왕실 잔치가 있으면 특별상여금까지 받아 요즘으로 치면 고액 연봉자였다”며 “궁 밖에 집이나 땅을 사서 재산을 모으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이말산 여성테마길’에 있는 조선시대 상궁 임씨 묘역. 국내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궁녀 묘비는 총 3개로 임 씨 묘비는 그중 하나다.

탐방을 시작한 지 1시간30여분을 훌쩍 지날 때쯤 아주 귀중한 묘 하나가 나타났다. ‘상궁 임씨’ 묘다. 조선시대 궁녀의 묘비는 3개가 남아 있다.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에 있는 상궁 옥구 임씨 묘비, 노원구 초안동 초안산에 있는 상궁 개성 박씨 묘비, 경기도박물관에서 소장한 상궁 안동 김씨 묘비다. 상궁 임씨의 묘는 <내시와 궁녀> 저자 박상진 은평향토사학회 회장이 2009년 비문을 해석해 확인했다. 양 해설사는 “묘비는 발견 당시 풀숲에 엎어져 있어 누구 묘인지 알기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상궁 임씨는 13살이던 1647년에 입궁해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등 40여 년 동안 네 명의 임금을 모셨다. 사망 후에는 숙종이 친히 비문을 내렸다. 숙종은 사랑하던 막내 여동생 명안 공주가 죽자, 생전에 임 상궁을 보모와 같이 여기던 것을 생각해 명안 공주 집에 머물며 그 제사를 받들게 했다. 1709년(숙종 35년) 상궁 임씨가 75살로 사망하자 숙종이 관을 만들 나무와 옷감을 하사해 장사 지내게 했다. 임씨의 비는 사후 4년이 지나 1713년(숙종 39년) 세운 것으로 현재 묘역에는 묘비와 상석이 남아 있다. 상궁 임씨는 보모상궁이었다. 궁중에는 보모상궁을 둬 왕자와 공주·옹주 등 왕실의 자녀 양육을 맡겼다.

오랜만에 야외에 나와서 좋은지, 학생들은 임 상궁 묘를 떠나 하산하는 길에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이말산에는 몇몇 무덤을 제외한 대부분은 오랜 세월 봉분이 깎이고 나무가 자라 무덤인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무덤을 지킨 석물도 넘어진 채 여기저기 흩어진 게,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산에서 내려오자 도로 맞은편에 기와를 얹은 한옥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이말산 여성테마길 탐방을 마친 학생들은 “궁녀들의 삶에 대해 알 수 있어서 재밌었다”며 즐거워했다.

은평구는 조선시대 궁녀를 중심으로 역관, 내시 이야기를 담은 ‘이말산 여성테마길’ 탐방을 지난 18일 시작했다. 이말산 여성테마길은 2019년 주민 제안으로 만들어 지난해 시범 운영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역관으로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김득련(1852~1930), 영조의 외할아버지 최효원(1638~1672), 왕명 전달자 내시 노윤천, 왕실의 자녀를 키운 상궁 임씨(1635~1709) 등의 묘를 둘러보며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다. 올해는 3월부터 11월까지 토요일에 총 24회 운영한다. 참가비는 무료로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시스템에서 선착순 접수하면 된다.

은평구는 2020년부터 이말산 테마길 해설사 양성 과정을 통해 해설사 5명을 배출했다. 올해도 3월부터 5월까지 10명의 해설사를 교육한다. 이들은 9월부터 보조해설사로 활동할 예정이다.

권혜림 은평구 가족정책과 여성정책팀장은 “조선시대 궁녀는 고액의 봉급을 받은 전문직 여성”이라며 “지역 문화자원을 활용한 이말산 여성테마길을 잘 가꾸고 해설사를 양성해 은평구가 여성친화도시를 만드는 데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글 이충신 선임기자 cslee@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