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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40대 초의 직장여성입니다. 지방에서 혼자 사시던 시아버님이 다치신 후 거동이 불편해 지난해부터 저희가 모시게 되었습니다. 일과 살림을 병행하기도 쉽지 않은데 중환자가 계시다 보니 어려움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수입이 뻔한 맞벌이 부부의 사정상 요양병원으로 모실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환자가 계시면 집안 분위기도 그렇고, 가끔 문병을 위해 찾아오시는 분들 때문에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이상한 약이나 치료를 권하는 것도 그렇고, 사소한 것 지적하듯 말씀하고 떠나면 정말이지 미칠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수발을 들어야 하는 건지, 기약이 없는 나날입니다. 하소연 겸해 몇 자 적습니다.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허약한 복지의 그늘이 곳곳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집 안에 거동이 불편한 장기 환자가 있으면 무거운 공기가 지배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물론 환자 자신이지만, 그것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가족들 역시 무척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라면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 더 괴롭습니다. 병환이 장기화되면 가족 모두 지칩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 환자, 말기의 고통을 앓고 계시는 암 환자가 계시면 보호자들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체력이 모두 바닥에 도달합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으리라 생각됩니다.
나이 드신 환자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조금 차도가 보이면 하늘을 날 듯하다가도, 고통이 찾아오면 바닥 모를 깊은 심연으로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이비 의술과 뭔가 순수하지 않은 다른 의도를 갖고 접근하는 사람들입니다. 과학과 거리가 먼 신비한 비방(남에게 공개하지 않는 특효의 약방문)을 말하곤 하지요.
“그 병에는 굼벵이에 금가루를 섞으면 최고예요. 드셔보세요. 금방 완치된답니다.”
환자는 귀가 얇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세심한 배려와 통찰력이 필요하겠지요.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환자는 누구보다 남의 말에 잘 속습니다. 전문가인 주치의의 말에 따라 바르게 간호하는 자식이 오히려 불효자로 낙인찍히기 쉬운 이유입니다. 어쩌다 찾아와 사탕발림으로 효도하는 친척이나 형제자매가 날마다 밤낮없이 손과 발로 모시는 사람보다 더 예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집안의 사소한 것을 트집 잡는 사람도 없지는 않습니다. 마치 정치인들처럼 무책임하게 인기 발언을 던지고 가는 바람에 속을 확 뒤집어놓기도 하지요.
“아이고, 환자 방이 왜 이렇게 청결하지 못해? 청소기 어디 있어? 내가 치울게!”
“강남 어디에 명의가 있다던데, 왜 그곳에 모시고 가지 않는 거야? 거기가 조금 비싸긴 하지만 특별 주사 한 방 맞으면 싸악 낫는다던데….”
날마다 밤낮없이 고생하는 쪽에서는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죠. 육체적으로 파김치가 된 상황 속에서도 환자를 위해 성심성의껏 돌보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무성의한 자식으로 호도되는 상황이 되면 맥이 풀리고 눈물이 날 겁니다. 저도 겪어보아서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치매 기운이 있는 노인분들 가운데는 정상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자주 보입니다. 제 지인의 부친은 모든 음식을 거부한 채 멜론 맛이 나는 빙과를 하루 10개, 오직 그것만 드신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의심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배우자나 가장 가까운 자식을 의심합니다. 그것은 언젠가 자기를 버릴 것이라는 인간의 본능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부모가, 혹은 배우자가 점차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더 나아가 자기를 의심하는 상황에 이르면 충격이 1차, 2차, 3차로 이어집니다. 아직 살아 있는 분이 그렇다는 것은 정말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틀에 박힌 위로나 덕담 역시 맥이 탁 풀리게 합니다. “곧 나아질 겁니다. 이 또한 지나갈 테니까요.” 물론 선의로 한 말들이지만 그런 진부한 위로의 말들을 계속해서 듣다 보면 충분히 지치고 짜증 날 수 있습니다. 침묵할 때는 침묵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되겠지요. 그런 소통 문화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거라 이해하세요. 형제가 없으면 없는 대로 부담이고, 많으면 많은 대로 시끄럽습니다. 누가 아픈 환자를 모실 것인가의 책임 문제, 그리고 유산 문제를 놓고 형제자매들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집니다. 제사보다 제삿밥에 더 관심 있다는 옛말 그대로인 세태입니다. 고질병 혹은 장기 환자가 있을 경우 단기전이 아니고 장기전입니다. 마라톤 한다고 생각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아니면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야겠죠. 집안의 형제자매들끼리 모두 부담을 나누거나 불가피할 경우 요양병원으로 모셔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 사람이 도덕적 무게까지 온전히 짊어져서는 곤란합니다. 장기전에 대비하려면 ‘우울의 전염’을 하루빨리 차단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한국적 여건으로 볼 때 일상 생업에 지장이 있겠지만, 의도적으로라도 집안의 우울한 분위기를 직장으로 이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집안의 당번을 정해놓고 나머지 사람은 바깥에서 유쾌하지는 않더라고 정상적인 일상의 모드로 이어나가야 합니다. 가끔 영화도 보고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고 커피를 홀짝거리며 수다를 떨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겨냅니다. ‘식구가 병석에 있는데, 어떻게….’ 물론 좋은 뜻이지만 긴장이 계속되면 몸과 마음이 버텨내지 못합니다. 곧 봄입니다. 화사한 봄 햇살이 필요한 것은 환자만은 아닙니다. 가족들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글 손관승 세한대학교 교수·전 iMBC 대표이사·MBC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치매 기운이 있는 노인분들 가운데는 정상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자주 보입니다. 제 지인의 부친은 모든 음식을 거부한 채 멜론 맛이 나는 빙과를 하루 10개, 오직 그것만 드신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의심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배우자나 가장 가까운 자식을 의심합니다. 그것은 언젠가 자기를 버릴 것이라는 인간의 본능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부모가, 혹은 배우자가 점차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더 나아가 자기를 의심하는 상황에 이르면 충격이 1차, 2차, 3차로 이어집니다. 아직 살아 있는 분이 그렇다는 것은 정말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틀에 박힌 위로나 덕담 역시 맥이 탁 풀리게 합니다. “곧 나아질 겁니다. 이 또한 지나갈 테니까요.” 물론 선의로 한 말들이지만 그런 진부한 위로의 말들을 계속해서 듣다 보면 충분히 지치고 짜증 날 수 있습니다. 침묵할 때는 침묵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되겠지요. 그런 소통 문화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거라 이해하세요. 형제가 없으면 없는 대로 부담이고, 많으면 많은 대로 시끄럽습니다. 누가 아픈 환자를 모실 것인가의 책임 문제, 그리고 유산 문제를 놓고 형제자매들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집니다. 제사보다 제삿밥에 더 관심 있다는 옛말 그대로인 세태입니다. 고질병 혹은 장기 환자가 있을 경우 단기전이 아니고 장기전입니다. 마라톤 한다고 생각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아니면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야겠죠. 집안의 형제자매들끼리 모두 부담을 나누거나 불가피할 경우 요양병원으로 모셔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 사람이 도덕적 무게까지 온전히 짊어져서는 곤란합니다. 장기전에 대비하려면 ‘우울의 전염’을 하루빨리 차단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한국적 여건으로 볼 때 일상 생업에 지장이 있겠지만, 의도적으로라도 집안의 우울한 분위기를 직장으로 이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집안의 당번을 정해놓고 나머지 사람은 바깥에서 유쾌하지는 않더라고 정상적인 일상의 모드로 이어나가야 합니다. 가끔 영화도 보고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고 커피를 홀짝거리며 수다를 떨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겨냅니다. ‘식구가 병석에 있는데, 어떻게….’ 물론 좋은 뜻이지만 긴장이 계속되면 몸과 마음이 버텨내지 못합니다. 곧 봄입니다. 화사한 봄 햇살이 필요한 것은 환자만은 아닙니다. 가족들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글 손관승 세한대학교 교수·전 iMBC 대표이사·MBC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