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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헌문’편 46장의 첫머리 말이다. 전문은 이러하다. ‘원양이사(原壤夷俟). 자왈(子曰) 유이불손제(幼而不孫弟), 장이무술언(長而無述焉), 노이불사(老而不死), 시위적(是爲賊). 이장고기경(以杖叩其脛).’ “원양이 삐딱한 자세로 공자를 맞았다(原壤夷俟).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어려서는 껄렁껄렁하고, 커서는 이룬 게 없고, 늙어서 죽지도 않는다면, 그런 걸 도적이라 하지. 그러면서 지팡이로 원양의 정강이를 툭툭 쳐주었다.”
대화의 분위기와 내용으로 보면 두 사람은 허물없는 사이이다. 오랜만에 만나면서 은근슬쩍 자기식으로 인생철학을 드러내고 있다. 원양은 오연한 자세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공자는 그런 원양의 ‘삐딱함’을 세 단계로 나눠 ‘돌직구’를 던진다. 공자에게 잘못된 지식인의 일생은 이렇다. 젊어서는 혈기와 재능을 믿고 세상을 깔보거나 허무로 여긴다. 기존의 경륜과 질서는 우습거나 속박에 불과하다. 젊은 사람이 오만하기만 하고 세상을 모르는 것이다(幼而不孫弟). 장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자기 이익만 좇는 소인이거나, 세상 탓만 하면서 계발과 성장을 게을리했다면 그는 볼만한 것이 없는 사람이다. 세상에 나와 무언가 사람들에게 보탬이 될 만한 공업(功業)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내놓고 이야기할 만한 거리가 없다(長而無述焉). 더욱이 존중받을 노후가 되어서도 여전히 나잇값을 못한 채 “내가 젊을 때는” 식의 타령이나 하면서 다음 세대의 걸림돌이 되고, 세상을 다 아는 체하면서 정작 자신은 뒤로 손가락질당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이런 늙음은 시간을 훔치고 있는 것이나 진배없으니, 그야말로 ‘노인불사 시위적’(老而不死 是爲賊)이다.
원양은 공자의 오랜 친구이다. 탈속의 삶을 추구한 사람 같다. 어머니가 죽자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좋은 곳으로 가셨는데 왜 우느냐는 반문이 당시에도 한편의 지적 유행이었다. 그런 도가류(道家流)에게 세상 걱정이 많은 유가(儒家)는 너무나 바쁜 인생이었을 것이다. 반면 공자에게 원양은 무도한 세상에 실망한 나머지 세상 밖으로 나가버린 친구이다. 밖으로 나간 이상, 세상을 ‘위해’ 할 일이 없다. 그것이 세상을 위해 ‘하는’ 유일한 일이다. 같은 일흔 나이에 여전히 ‘바쁜’ 공자가 여전히 ‘안 바쁜’ 원양의 정강이를 툭툭 친 것은 그런 관(觀)의 차이에 대한 가벼운 확인 절차였으리라. 아무튼 두 사람은 오랜만에 즐겁게 취했을 것이다.
이인우 <서울&>콘텐츠디렉터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