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소식

구한말 조선 그린 ‘유럽 만평’을 비틀다

은평구 삼각산금암미술관 ‘내 손이 사라졌다-유럽이 그린 구한말 조선’ 전시

등록 : 2024-06-27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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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 그린 구한말 조선’을 토대로

이부록 작가가 아카이브 작품 전시

한낱 ‘먹잇감’이던 조선에 대한 인식

비틀고 꼬집으며 새 세계로 ‘손기척

은평구는 고문헌연구회, 이부록 작가와 함께 30일까지 삼각산금암미술관에서 ‘내 손이 사라졌다-유럽이 그린 구한말 조선’ 전시회를 열고 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거셌던 19세기말, 유럽의 신문과 잡지에 조선이 등장하죠. 하지만 당시 유럽인들에게 조선은 ‘중국 변방에 위치한 미개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식민주의로 점철된 유럽인들의 인식은 언론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황주은 고문헌 연구회 기획과장은 18일 “현재는 ‘케이(K)콘텐츠’가 유행하지만, 한국과 한국인을 향한 서구인들의 편협한 시선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했다.

은평구가 고문헌연구회, 이부록 작가와 함께 30일까지 삼각산금암미술관에서 ‘내 손이 사라졌다-유럽이 그린 구한말 조선’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 전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조선을 그린 유럽의 만평들과 이를 아카이브 설치 작업으로 재해석한 이부록 작가의 작품을 함께 선보이고 있다. 이 작가는 ‘녹음방초 회초리’ ‘적막강산 메들리’ ‘노크동맹 얼라리’ ‘속수무책’ ‘슬로퍼씨의 노크코리아’ ‘노크지’ ‘고문헌 기산부록’ ‘노크신보’ 등 작품 100여 점을 통해 당시 조선인의 눈으로 조선에 대한 유럽의 시선을 비틀고 꼬집으며 새로운 세계를 향해 ‘손기척’(노크)을 보낸다.


이 작가의 작품은 고문헌연구회가 2022년 11월 발간한 ‘유럽이 그린 구한말 조선’을 토대로 했다. 고문헌연구회는 북쪽에 소장된 고문헌과 일제강점기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 연구하기 위해 2020년 만들어졌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경색되자 북쪽 소장 자료를 들여오기 어려워졌다. 고문헌연구회는 이은정 독일 베를린자유대 한국학연구소 교수가 2020년부터 유럽인의 한국 인식과 관련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해온 사실을알고 이 교수의 도움을 받아 ‘유럽이 그린 구한말 조선’을 출간했다.

이 교수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신문과 잡지에 수록된 1910년 이전 한국 관련 기사와 만평 등에 관심을 집중시켰는데, 이 교수가 발굴하고 수집한 유럽의 만평들은 한결같이 조선이 겪은 수난을 ‘조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황 기획과장은 “유럽의 만평에서 조선은 주로 테이블 위 돌멩이, 벌집, 물고기 등 사물이나 동물로 표현돼 제국주의 열강의 ‘먹잇감’ ‘내셔널 굿즈’로 묘사된다”며 “이 작가는 전시장에 식민지를 차지하려는 열강의 협상 테이블을 상징하는 검은 테이블을 놓고, 그 위에 ‘먹잇감’을 올려놓아 당시 조선의 슬픈 운명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이 작가는 영국에서 태어난 알리 슬로퍼를 작품에 등장시킨다. 슬로퍼는 세계 최초로 연재된 영국의 만평 주간지 <알리 슬로퍼의 반쪽 휴가>(Ally Sloper’s Half Holiday)의 캐릭터로 빨간 코가 특징인 게으른 사기꾼이다. 빅토리아 시대인 1884년 처음 출판된 주간지 <알리 슬로퍼의 반쪽 휴가>의 이름은 당시 노동자들이 토요일 점심에 집으로 가는 관행에서 비롯됐다.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이 아닌 만평이라는 대중이 접근하기 쉬운 매체로 시대를 풍자하며 슬로퍼 또한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알리 슬로퍼의 반쪽 휴가> 1894년 8월25일치에는 슬로퍼가 조선의 왕이 탄 가마를 노크하는 모습을 담은 만평이 실렸다. 슬로퍼가 “왕께서는 중국과 일본의 전쟁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고 믿어도 될까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답이 없자 슬로퍼는 “왕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군”이라고 말한다. 이 만평은 조선의 왕을 조롱하듯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것으로 당시 조선에 대한 유럽의 인식이 어땠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 작가는 슬로퍼가 조선의 왕을 인터뷰하기 위해 가마에 노크하는 장면에 착안해 작품 곳곳에 슬로퍼의 ‘손’을 등장시킨다. 이손은 만평에 새겨진 조선의 수난기, 유럽인의 식민주의를 드러내고, 더 나아가 이제 다른 두 세계의 문을 연결해 서로 만나게 하는 ‘손기척’을 수행한다. 나아가 조선과 제국주의 유럽이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가는 작가 수첩에서 “한 세기 전의 유럽의 관점(식민주의)에서 기록한 만평의 속살에 새겨진 수난기를 드러내고, 다시 두 세계를 연결함으로써 도래할 공동체의 틀을 설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가는 조선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도 불러냈다. 작품을 통해 기산의 그림 속 인물들이 슬로퍼와 만나 새로운 공동체를 설계한다. 기산은 개화기 부산, 원산 또는 제물포 등에서 활동한 풍속화가로 다양한 조선의 풍속을 그려 서양인들에게 판매했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 박물관에 기산의 그림 1500여 점이 전해지며 외국에서 더 유명한 ‘조선 풍속화가’이다.

이 작가는 슬로퍼와 기산을 불러낸 데 이어 고문헌 속 인물들의 얼굴도 없앤다. 또한 제국주의 열강을 불러내 회초리로 혼내고, 한데 모아놓고 악기도 쥐여준다. 서로 싸우던 궁궐 안이 칼춤꾼 경연장으로 변하고 전쟁을 종식시키는 작가의 예술적 상상은 종횡무진한다.

조금 난해한 전시를 이해하는 데는 이 작가의 작가노트를 통해 그 ‘의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응당, 유럽이 그린 구한말 조선 다시 그리기, 만평을 만평하기, 구하지 못한 말에 노크하기, 소실점에서 사라진 문에 노크하기, 속수무책 묶인 손을 풀어 어루만지기, 고문헌 원전 악기 캐릭터 손에 쥐여주기, 덧씌운 모자 벗겨 사기꾼 민머리에 물주기, 우거졌던 녹음방초 부러진 나뭇가지로 회초리 만들기, 불한당들의 세계사에 노크하기.”

이 작가는 “사기꾼 슬로퍼와 기산 풍속화 등장인물의 조우를 그리는 것은 화병의 조화가 아닌 조화로운 그림, 빈 화병에서 오아시스의 샘을 만들어내는 일, 시대-풍경화의 소실(소멸)점은 다른 세계의 생성점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이 작가의 작품 속에서 슬로퍼의 사라진 손은 다른 여러 세계관의 문을 노크하는 손으로 돌아다닌다. 손을 잃은 슬로퍼가 우리를 쳐다보기도 한다. 그리고 슬로퍼의 사라진 손은 서로 만나지 않았을 두 세계를 결합하는 손으로 다시 우리 앞에 선다.

이부록 작가는 제국주의 열강의 협상 테이블을 상징하는 검은색 테이블과 이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조선을 상징하는 돌멩이로 당시 조선의 슬픈 운명을 표현했다.

이충신 선임기자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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