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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배 없어도 되는 세상

사봉묵칙(斜封墨勅) 비스듬할 사, 봉할 봉, 먹 묵, 조서 칙

등록 : 2017-10-19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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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봉(斜封)은 봉투를 비스듬하게 접는다는 말이다. 겉모양으로 뜻을 암시하는 방법이다. 묵칙(墨勅)은 정부기관을 거치지 않고 임금이 직접 내려보내는 친필 명령을 뜻한다. 주로 인사나 재물에 관한 일을 임금이 임의로 처리하고 싶을 때 썼다. 두 행태를 합친 말인 ‘사봉묵칙’은 중국 당나라 중종 때 황후와 공주들이 뇌물을 받아먹고 벼슬을 내리는 수법에서 유래했다. 출전은 <신당서>. 사봉묵칙은 이후 권력형 매관매직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측천무후의 박해를 받다가 즉위한 중종의 부인 위후는 황후가 되자 재물과 사치에 빠져 수도 없이 뇌물을 받고 비스듬하게 봉투를 접었다. 아버지 중종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막내딸 안락 공주도 어머니 못지않았다. 뇌물을 바친 자의 임용안을 묵서로 만들어 아버지에게 들이밀었다. 이런 사봉묵칙으로 모녀가 조정에 밀어넣은 사람이 무려 1000여명. 백성들은 이들을 ‘사봉관’이라고 비웃었다고 하니 국정의 체면도, 공직의 권위도 말이 아니었다.

사봉묵칙 같은 권력형 인사 부정이 가능했던 것은 내비(內批)라는 봉건 시대 관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비는 임금이 조정의 공식 논의를 거치지 않고 직접 담당자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왕조 시대가 아닌 오늘날이라고 사봉묵칙 같은 내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향평준화되었다. 최근 <한겨레>가 집중보도한 ‘강원랜드 채용청탁 사건’ 보도(<한겨레> 16일자)에 따르면, 2012~2013년 2년간 채용된 최종합격자 518명 전원이 유력자들의 취업 청탁 대상자였다고 한다. 그중 256명은 사장이 점을 찍어준 사람이라고 한다. 현대판 사봉묵칙이 따로 없다.

합격자 모두가 청탁 때문에 뽑혔다는 증거는 없으나, 적어도 모든 합격자가 청탁의 뒷배를 끼고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실력을 갖춘 사람마저 썩은 동아줄이라도 감고 있지 않으면 불안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 수준과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이보다 더 적나라할 수 없다.

이 코미디 같은 사건은 정권 차원을 떠나 문재인 정부가 꼭 해야 할 우선 과제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전 사회에 걸쳐 사봉묵칙이 통하지 않는 공정 사회의 실현이다. 배운 것이 많고 가진 것이 많은 계층일수록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발휘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도 아니면 앞으로 생길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가 저승사자 같은 포청천이 되어주길 바랄 수밖에.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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