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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빌려서 괵나라를 멸망시킨다’는 말이다. <천자문>에 나오고, 고사의 출전은 <좌전>이다. ‘강자가 목적 달성을 위해 제삼자에게 협조 내지 묵인을 강요한다’는 뜻으로, 또는 ‘눈앞의 이익을 좇다가 결국 미래의 자신도 망친다’는 의미로 가끔 인용된다.
고대 중국 춘추시대, 강대국 진나라는 괵나라를 무력으로 합병하기 위해 이웃한 우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진나라를 겁낸 우나라 임금은 결국 길을 빌려주었고, 진나라는 괵나라를 빼앗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까지 집어삼켰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나라의 망국은 정해져 있었다. 강대국이 이미 전쟁을 결정한 상태라면 약소국은 그 결정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 국제정치가 아닌가?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겉으로 내건 명분이 ‘정명가도’였다. 명나라를 치러 가니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다. 조선이 이를 받아들였으면 임진란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쟁은 침공을 억제할 만한 국력을 갖고 있거나, 전쟁 의도를 사전에 차단하는 외교력이라도 있어야 피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는 강대국 진나라와 그에 맞선 괵나라 사이에 낀 우나라와 비슷한 처지였다. 그런데 곧 전쟁을 벌일 것 같던 기세의 트럼프가 김정은이 초대한 도박판에 마주 앉기로 한 반전이 일어났다. 두 사람이 무슨 패를 어떻게 주고받을지 모르지만, 기왕 이렇게 된 이상 목표는 최소한 ‘윈-윈’일 것이다. 그러면 승부의 진짜 승자는 누구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나라가 ‘가도멸괵’의 위험천만한 코너에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운전대를 단단히 부여잡고 극적인 드라이브를 수행했다.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문재인 외교’를 보며, 조금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고대 중국의 뛰어난 정치가 자산(子産)과 근대 일본을 만든 ‘삿초동맹’의 주역 사카모토 료마를 상상해본다. 자산은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의 재상이었으나, 탁월한 외교력과 도덕성을 발판으로 오히려 강대국들을 리드하며 조국을 열강의 대열에 세웠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 말기 도사번(藩) 출신의 사무라이 사카모토 료마는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서로 원수같이 대립하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동맹시켜 ‘근대화된 통일 일본’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나아가게 했다. 오는 4월과 5월 사이에 우리에게도 그런 역사적 전환이 시작되기를.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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