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고사성어

전쟁 비용보다 싼 화친

천토회맹(踐土會盟) 밟을 천, 흙 토, 모을 회, 맹세 맹

등록 : 2018-04-26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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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토회맹’(踐土會盟)은 천토라는 곳에 모여 하늘에 맹세하다는 뜻이다. <천자문>에 나오며, 출전은 <춘추좌전>이다. 기원전 7세기 중국 진(晉)나라를 중심으로 한 제후 연합군은 남방의 신흥강국 초(楚)나라 연합군을 성복이란 곳에서 격파한다. 이 대회전을 승리로 이끈 진문공은 전쟁에 참여한 여러 제후를 천토에 불러모아 맹세의 표시로 입술에 피를 바르고 평화를 서약하도록 했다. 중화 질서를 수호한 것으로 유명한 이 사건을 후대 역사가들은 천토회맹이라고 일렀다.

이후 회맹의 전통은 11세기 초 북송과 요나라가 맺은 ‘전연의 맹약’으로까지 이어진다. 당나라의 ‘중국’을 계승한 송(宋)나라와 북방의 거란족이 세운 신흥강국 요(遼)나라는 형세상 한판 대결이 불가피했다. 요나라 섭정인 승천태후와 아들 성종이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송나라를 침공한다. 송나라 진종도 이에 맞서 수도 개봉 근처인 전연이란 곳에서 대치하게 된다. 그러나 정면대결은 피차 출혈이 너무 커 화친을 시도한다. 경제력이 월등한 송나라는 돈을 내놓고, 군사력이 강한 요나라는 창칼을 거두는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됐다.

이 ‘전연의 맹약’으로 두 나라는 이후 백년 가까이 태평성대를 누렸다. “돈으로 평화를 샀다”는 비판도 있지만, 송나라가 요나라에 매년 제공한 세폐는 전쟁 비용의 10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는 분석이 있다. 나중에 두 나라 모두 지나치게 평화에 도취한 나머지 외세에게 망했다는 점을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전연의 맹약에서 얻는 교훈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오늘은 남과 북의 정상이 얼굴을 맞대고 한민족의 항구적인 평화를 약속하고 통일을 다짐하는 역사적인 날이다. 그동안 남북 정상회담은 남쪽 정상이 북쪽의 ‘혁명 수도’를 찾아가는 형식으로 두 차례 열렸고, 남쪽의 서울에서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이번 회담의 장소로 ‘분단의 상징’ 판문점이 선택된 것은 전쟁과 대립을 종식하려는 민족의 염원에서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우리 모두의 무의식에는 오랜 동아시아 문명 속에서 전승되어온 평화를 바라는 ‘회맹’의 정신이 작동하고 있다. 천토회맹의 맹세문이 <좌전>에 기록돼 있다.

“모두 왕실을 도와 서로 해치지 말라. 이 맹약을 어기면 명신(明神)이 벌을 내려 그 군대를 실추(失墜)시켜 국가를 향유하지 못하게 하고, 너의 자손에 이르기까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재앙을 받을 것이다.” ‘왕실을 도와’를 ‘민족을 위해’로 바꾸어 다시 읽어본다.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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