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강남 투기 선구자는 청와대 박종규…6천억 뚝딱”

‘강남의 역사’ 쓴 한종수씨. 강남 초기 개발 과정과 투기 실태 증언

등록 : 2016-06-16 14:51 수정 : 2016-06-17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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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투기와 뒤얽힌 강남 개발의 역사를 책으로 엮어낸 한종수씨가 올해 4월 강남 한복판에 선보인, 가수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에 나오는 말춤 동상 아래에 서 있다. 뒤편으로는 한 세대 전인 1988년에 들어선 코엑스가 보인다. 사진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서울 강남의 역사는 지난 세기 한국인들이 추구한 부와 욕망을 기록해둔 압축 파일 같다. 그 시간과 공간을 풀어내면 곧 대한민국의 현대사이자, 우리 자신의 민낯이 된다. 왜 그럴까? 그곳의 성공과 실패가 현대 한국인들에게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욕을 해대면서도 끼어 있고 싶은 곳, 그래서 ‘욕망의 용광로’(강준만,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였고, ‘한바탕 꿈’(황석영, <강남몽>)인 곳이 바로 강남이다.  

그렇게 우리 옆에 실존 중인 강남의 ‘개발사’를 다룬 <강남의 탄생>(미지북스) 지은이 한종수씨에게 강남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씨는 얼마 전까지 토지공사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세종시 도시재생센터 사업지원팀장으로 일하면서 글을 쓰는 공무원 신분의 저술가이다.  

책을 쓴 분에게 직접 강남의 역사를 듣고 싶었다. 강남 개발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60년대 서울은 농촌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포화 상태였던 도시 인구를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던 박정희 정부는 1966년 ‘남서울 개발’이라는 다소 엉성한 계획을 세운다. 한남동과 압구정동을 잇는 제3한강교가 소리 소문 없이 착공되고, 2년 뒤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한다. 이 두 사건은 별개였지만 강남 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강남의 시작이다?  

“고속도로 공사는 자동차 시대의 서막이다. 철도에서 도로로 산업화의 축이 바뀌었다.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이 되는 강남의 개발은 필연이었다. 흐름을 꿰뚫어본 사람들이 강남 땅을 헐값에 ‘수집’하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공사 착공 1년 만에 압구정동 땅값은 15배가 뛰었고, 80년대 초에 이르러 강남 땅값은 평균 2000배가 올라 있었다. 강남이 탄생한 것이다.”  

강남에 아파트 한 채와 소나타 한 대를 가진 가정이 되는 것이 온 국민의 목표가 되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사건이 터진 것도, ‘복부인’이 영화로 만들어지고, 윤수일의 ‘아파트’가 대히트를 친 것도 세태의 흐름을 정확히 읽은 결과였다.  


결국 강남의 아버지는 박정희?  

“한국 도시개발사의 산증인인 고 손정목 교수의 말대로, 경부고속도로는 독일의 아우토반을 직접 달려 본 박정희의 작품이었다. 자동차 등록 대수가 2만 대에 불과한 시절에 고속도로는 무모한 발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산업화의 교통 축을 철도에서 도로로 바꾸었고, 그 결과 강남이 만들어졌다. 강북에는 있고 강남에는 없는 것이 바로 철도역이다. 그것이 한국 산업화의 방향이었고, 강남은 그 필연적 산물이다.”  

강남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부동산 투기다. 수많은 사람들이 편법으로 강남에서 부를 일궜다. 강남 부동산 투기의 원조는 누구일까?  

“영동백화점 창업자 김형목, 삼호 그룹의 조봉구 등이 대표적인 강남 땅부자들이었다. 그러나 투기라는 측면에서 ‘선구자’는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였다. 박종규는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윤진우를 시켜 개발 예정지 땅을 입도선매했다. 담당 공무원을 하수인으로 거느렸으니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몇 년 새 튀긴 차익금이 약 6000억원이었다고 한다. 이 돈은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 집권층의 선거자금과 정치자금으로 상납됐다. 복부인의 등장은 이 과정의 파생물이었다. 윤진우가 땅을 사면 냄새를 맡은 꾼들이 복부인들을 몰고와 주변 자투리땅을 사들이는 식이었다. 이것이 부동산에 관한 한 ‘강남불패’ 신화의 본질이다.”  

이 책은 지난달 별세한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로부터 많이 빚진 것 같다. 타계한 다음 날 책이 나온 것도 묘한 인연이다.  

“손 교수는 강남 개발이 한창일 때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냈고, 대학에서 오랫동안 한국 도시개발사를 연구하신 분이다. 서울에 관한 저술이나 영화치고 그분의 신세를 지지 않은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인터뷰도 그분을 기념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  

손 교수는 “1960년대 초에서 1990년까지 30년 사이 한국의 개발독재 시기에 전개된 도시화만큼 급격한 사례는 지구상에서 찾을 수가 없다. 지난날에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2003)고 했다. 그런 강남이 대규모 재개발과 리모델링을 통해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는 듯하다.  

“영동대로 지하 개발, 삼성동 현대사옥 신축, 잠실종합운동장 구역 재개발 등을 보면 30여년 만에 한 사이클이 도는 것 같다. 여기에 문화적 변화 등 질적 변화도 엿보인다. KTX 수서역이 들어서는 것도 의미 있는 변화의 시작이 될 것 같다.”  

강남은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일약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오렌지족이란 비아냥을 듣던 강남의 키치 문화가 ‘한류’를 낳았다. 정치적으로는 오랜 보수우익의 정점이었지만, 지난 4월 총선에서는 호남 출신 야당 후보들이 당선되거나 선전하는 변화도 보였다. 청담동의 명품거리도 과거와 같은 속물성을 탈피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현재의 강남을 만든 변곡점이었다면, 다음은 문화가 되지 않을까? 1981년 만들어졌던 택지개발 촉진법이 내년에 사라진다. 대규모 신도시 개발의 시대가 끝났다는 뜻이다. 기반을 갖춘 도시들은 양적 팽착이 둔화되면 내실 중심의 다른 차원으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그런 도시의 모습은 개발 시대와는 분명 다를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한씨는 책을 쓰면서 도시개발에 관한 기록 보존의 필요성도 새삼 절감했다고 한다.  

“세계 도시화·산업화의 역사 중 우리의 도시개발만큼 급격한 사례가 없다는데, 그에 대한 자료와 사료가 너무 없다. 개발의 속도와 부패를 감당할 수 없었던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신도시들의 개발 역사를 보여 주는 도시계획박물관 하나 없다는 것이 참 안타까웠다.” 글 이인우 <서울&> 콘텐츠 디렉터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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