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소식

“코로나 스트레스, 모두 열차에 두고 하차하세요”

‘감성방송’ 하는 서울교통공사 센추리 클럽 회장 최병진 차장

등록 : 2020-04-16 14:45 수정 : 2020-04-17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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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코로나 극복 2분 메시지의 주역

16년 첫 메시지, 잇단 승객 칭찬 ‘뿌듯’

‘칭찬 100건’ 받은 회원들로 클럽 구성

“긍정적인 힘 됐다” 한마디가 큰 동력돼

지난 9일 서울교통공사 수서승무사업소 최병진 차장이 승객이 모두 내린 3호선 회차 시간을 활용해 곧 운행을 재개할 열차 기관사실에서 방송 연습을 하고 있다.

“고객님, 보고 계신 휴대폰은 잠시 내려두시고 차창 밖 한강을 바라보세요.”

지난 9일 오후 4시55분. 압구정역을 출발한 열차가 동호대교로 진입하던 순간이었다. 마스크를 쓴 스무 명가량 시민들이 고개를 들고 창밖을 향했다. 해 질 녘 한강에 윤슬이 가득했다.

“지금 어려움도 힘을 합해 참고 견디고 나면 더욱더 큰 기쁨과 행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코로나19, 두려움이 아니라 함께 이겨낼 대상입니다. 고객님, 힘내시고 오늘도 희망을 안고 파이팅 하시기 바랍니다.”


목소리 주인공인 서울교통공사 소속 수서승무사업소 최병진(53) 차장을 강남구 수서역에서 만났다. 코로나19로 감염병 위기단계가 ‘심각’으로 접어든 이후 역사 안 방역 노력이 한창인 때였다. “지하철은 서민들의 교통수단이잖아요. 저희 ‘감성방송’을 듣고 내일 하루도 열심히 살아볼 의지가 생겼다는 일용직 노동자의 말, 피로가 풀렸다는 직장인들 말, 요즘처럼 코로나19로 마음이 예민해진 가운데 긍정적인 힘이 됐다는 말 등 시민들 칭찬민원을 받으면 저 역시 큰 동력이 됩니다.” 최 차장이 말했다.

최병진 차장이 코로나19로 시민 안전과 방역이 우선인 요즘 수서승무사업소 박정일 부장과 더불어 지하철 방역 현장을 소개했다.

최 차장은 서울교통공사 ‘센추리 클럽’ 회장이다. 센추리 클럽은 안내방송 칭찬민원 100건 이상 받은 승무원들 모임이다. 서울교통공사 소속 전체 승무원 3292명 가운데 20명만 선발됐을 정도로 진입 장벽이 높다. 선발된 승무원들의 자긍심이 크고 에피소드가 다양한 이유다.

최 차장은 첫 감성방송을 내놓던 2016년 여름 무렵을 떠올렸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다. 1996년 기술직으로 입사한 뒤 2003년 승무원으로 전환해 일해온 지 20년을 맞은 해였다.

“반복되는 업무로 권태감이 심하게 몰려왔어요. 당시 백화점이나 카드사 등으로부터 ‘화창한 봄 보내세요’ 같은 의례적인 문자를 받았는데, 이걸 지하철 방송에 접목해보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문안을 적어 과감하게 방송했던 첫날 수서승무사무소 칭찬민원 게시판에 제 사진이 딱 올라온 겁니다. 한 시민이 ‘힘이 났고 좋았다’고 응답하신 거죠. 그 순간 인간의 우울함은 약이나 술, 운동 뭐 그런 것보다 타인의 격려와 칭찬으로 나을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 후 시를 읽고 책을 읽으며 감성방송 문안을 구성하게 된 겁니다.”

회차 때마다 수시로 실시하는 방역 모습.

최 차장은 휴대전화에 수십 개 방송 문안을 써놓고 칭찬민원과 현장 반응을 토대 삼아 수정을 거듭한다고 말했다. 지난 2년 동안의 노하우가 쌓여 보물과 다름없다며 긴장 섞인 목소리로 하나씩 차례로 읽어 내려갔다.

“고객님, 우리나라가 저출산 국가라는 사실 다 아시죠? 초기 임신부는 육안으로 구별이 안 돼 자리 양보받기가 어려운데요. 임산부를 위한 임산부석 양보, 오늘부터 시작하면 어떨까요?” 이처럼 부드러운 첫마디로 시작하는 ‘임산부 배려 방송’은 때마다 칭찬민원이 줄을 잇는다. “한 주 마무리하는 금요일 저녁.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네 삶이 치열한 올림픽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늘 그렇듯 주어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고객님, 힘내세요.” 저녁 무렵 시민들을 다독이는 ‘퇴근 방송’도 마찬가지다. “나무와 꽃들이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난 뒤 꽃망울을 터트리듯 지금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도 힘을 합해 참고 견디고 나면, 잃은 것보다 얻는 것이 더 큰 기쁨과 행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한강을 가로지를 때 내놓는 ‘희망 방송’도 최 차장이 공들여 방송하는 문안이다.

2018년엔 칭찬민원 100건을 달성한 소수 회원과 ‘센추리 클럽’ 창단식도 했다. 최 차장은 ‘1호’다. 최 차장은 9일자 기준으로 445개째 칭찬민원을 쌓았다. 그런 만큼 요령이 붙을 만하지만, 매번 마이크 앞에 서면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라고 토로했다. 무엇보다 안전이 우선인데다 의외로 고려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노선별 특징, 지하철 속력, 지하철 기종, 창밖 풍경 인지, 계절 감각, 볼륨 조절 등의 준비 작업은 당연하다. 거기에다 운전하는 기관사와의 호흡까지 맞춰야 한다. 큰맘 먹고 용기 냈다가 불쾌한 민원이라도 들어오면 풀이 죽는다. 다시 마이크 잡기가 쉽지 않다. 평균 2분의 방송을 위해 회차 시간엔 막간 리허설을 할 정도로 숨은 노력을 기울인다.

최 차장은 일종의 ‘장인 정신’이라고 했다. 방송 노하우를 쌓고 선례를 남기며 후배들을 양성하는 일이 ‘센추리 클럽’의 취지라는 것이다. “초창기엔 술에 취한 시민이 ‘왜 내 인생에 간섭하냐!’며 비상벨을 눌러 윽박지르신 적도 있어요. 시간이 쌓인 올해는 센추리 클럽 21호, 22호, 23호 등 줄줄이 등장을 기대할 만큼 시민들 칭찬민원이 많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승무원은 시민들의 안전과 행복이 먼저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서울교통공사 열차에 탑승하시는 시민분들, 코로나19로 인한 스트레스 등은 열차에 다 내려두고 하차하세요. 저희가 종착역에서 모두 수거해 처리하겠습니다.(웃음)”

글·사진 전유안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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