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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건달’ 입방아 딛고 ‘동네활동가’로 성큼

‘서울시 우리동네 행복한 골목만들기 사업’ 추진 김정호 씨

등록 : 2016-08-04 17:55 수정 : 2016-08-05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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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오전 안평초등학교 학생 넷과 마을활동가 김정호(39) 씨가 통학로를 따라가며 안전을 위협하는 장애물을 사진에 담고 있다. 장수선 인턴기자 grimlike@hani.co.kr

“구청장님이요!” “문방구 아저씨요!” “교장 선생님이요!”

지난 26일 오전 9시 동대문구 장안동 안평초등학교 ‘미디어 수업실’에서 마을활동가 김정호(39) 씨가 “통학로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고 묻자 아이들이 쏟아놓은 답변이다. 여름방학에도 교실을 찾은 25명 아이들의 눈망울은 똘망똘망 빛났다.

아이들은 이틀 동안 4개 모둠으로 나뉘어 자신들의 통학로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안전 울타리가 없는 좁은 인도와 어지럽게 주차된 차량, 오토바이,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등을 통학길 위험 요소로 지목했다. 안평초등학교 4학년 장은서 양은 “인도가 넓어지고 담장(안전 울타리)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라며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생기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대안을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안전한 통학로 만들기 체험은 아이들에게 통학로의 주인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 마을만들기 참여

아이들에게 소중한 경험을 하게 한 ‘난! 우리 동네 행복 골목 디자이너’ 프로그램은 서울시 ‘우리동네 행복한 골목만들기 사업’ 공모에 선정된 프로젝트다. 공모를 주도한 김정호 씨는 스스로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두 아이의 아빠, 현대종합설계사무소 디자인1실에서 도시계획을 담당하는 평범한 직장인, 장안1동 주민자치위원회 마을만들기 분과위원장, 안평초등학교 학교운영위원회 위원장, 마을공동체 매거진 <동그랗게> 발행인 등이 김 씨가 보여 준 모습이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도시계획을 공부했어요. 교수님도 건축하는 친구가 왜 마을에 관심을 두느냐고 물으셨어요. 도시와 건축을 함께 전공한 것이 특이하다고 생각한 거지요.”


 김 씨는 “도시계획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커뮤니티를 조직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빠가 되면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터에서 방전돼 삶터에서 무기력한 내 모습을 확인하면서 삶의 균형을 찾고 싶었어요. 다른 공간과 먼 미래가 아닌 현재의 내 삶터, 아이를 키우는 마을에서 말입니다.” 김 씨가 동네에 기여하는 여유 있는 삶을 희망하게 된 계기다.

 “좋은 아빠의 조건은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아이와 소통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아이의 일상에 등장하는 친구 이름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린이집에 부탁해 반 친구들 사진과 이름을 출력해 식탁에 붙였지만, 잘 외워지지 않더라고요.”

아이와 함께하는 놀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김 씨는 2012년 서울시 부모 커뮤니티 사업 공모에 참여했다. ‘마을이 고향이다’가 주제였다. “아이들에게 어린이집 친구에서 동네 친구로 함께 성장하는 친구와 함께하는, 추억이 살아 있는 고향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공모전에 나서게 된 이유다. “사업이 선정되고 열다섯 가족이 참여해 ‘장한가족들’ 커뮤니티가 탄생했어요.” 김 씨는 이들과 함께 수요 동네 놀이터 마실가기, 아빠와 요리 체험, 부모 인문학 강의 등 다양한 놀이와 체험을 함께했다. 올해 공모한 ‘우리 동네 행복 골목 만들기'도 동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

집과 학교를 오가는 길목만이라도 편안하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면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을까 싶었다.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건 사실 불가능하잖아요. 차라리 아이들이 닥치게 될 위험에 스스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지요.” 아이들은 김 씨의 바람대로 이틀간의 워크숍을 통해 통학로의 위험 요소를 스스로 배우고 대처 요령도 만들어냈다.

 김 씨는 마을활동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도 열심이다. 기록이 있어야 다른 누군가가 비슷한 일을 할 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드는 일을 지속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2014년 <장안마을 장한가족들 이야기>로 시작한 마을공동체 잡지는 지금은 동대문구 부모 커뮤니티 연합의 이야기를 다루는 연간지 <동그랗게>로 성장했다. 사람 사는 마을살이의 재미를 두루 다루는 잡지의 틀도 갖췄다.

작은 일에서 시작하는 네트워크가 큰 힘

이렇게 조금씩 마을공동체를 향해 발길을 재촉하는 김 씨도 처음부터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자영업자, 동네 백수 등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사람이라는 입방아에 오르내렸어요. 단지 아이들과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 건데 편견이 생기더라고요. 엄마들이 저를 신뢰하고 마음을 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지요.” 지금은 색안경을 쓰고 보는 시선보다는 신뢰를 갖고 도움을 주는 주민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김 씨는 마을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네트워크이며 그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지만 공동의 일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장안동 스크린 경륜장 확장 반대 서명 운동을 경험하면서 네트워크는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때 쑥쑥 자란다는 사실을 체득했어요.” 김 씨는 서명 10일 만에 2349명의 서명을 받은 일을 계기로 장평중학교, 군자초등학교, 안평초등학교 학교운영위원회가 참여하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진 경험을 들려주었다. 네트워크가 만들어지자 활동은 쉽게 공유됐고 공유는 마을을 변화시키는 더 큰 힘을 만드는 기반이 됐다. 2년 전부터 도시연대에서 발행하는 <걷고 싶은 도시>에 연재하는 ‘아빠와 만드는 마을만들기’ 글을 모아 책으로 출간할 준비도 하고 있다.

박용태 기자 gangto@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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