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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 시흥5동 은행나무마트 노수봉 대표가 마트 입구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노 대표는 14년 동안 쌀 1만8천포(포당 10㎏)를 이웃을 위해 기부해왔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어릴 적 이웃 돕는 어머니 가르침 받고
학생운동할 때는 사회적 책임감 배워
회사 비리 보고 그만둔 뒤 장사에 매진
목표액 안 나오면 밥 굶는 의지로 성공
“어머니가 교회에 다니셨어요. 항상 ‘없는 살림이지만, 먹고살 수 있다면 10분의 1은 어려운 사람 도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죠.”
금천구 시흥5동 은행나무마트 노수봉(56) 대표는 2009년부터 2022년까지 14년 동안 쌀 1만8천 포(포당 10㎏)를 이웃을 위해 기부해왔다. 요즘 가격으로 환산하면 6억8천만원가량 된다. 올해도 1300포(5천만원 상당)를 시흥5동 주민센터에 기부해, 지난 1월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노 대표는 금천미래장학회에도 2012년부터 매년 700만원에서 1천만원씩 장학금을 기부하고 있다.
노 대표는 은행나무마트 외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서 느티나무마트와 소나무마트를 운영하고 있다. 노 대표는 금천구뿐만 아니라 마트를 운영하고 있는 용인시에도 매년 어려운 이웃을 위해 1천만원, 수지고 노인회에도 어버이날이 되면 300만원씩 기부해왔다. 코로나19로 경제가 어려운데도 노 대표의 기부 활동은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2월23일 시흥5동 주민센터에서 만난 노 대표는 “쓰고 남은 것을 기부하는 게 아니라, 기부하고 남는 것으로 먹고산다”며 활짝 웃었다.
이처럼 노 대표가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데는 어머니 영향뿐만 아니라 남다른 사연이 있어서다. 인하대 기계공학과 84학번인 노 대표는 1980년대 당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무시무시한 군사독재 정권 시절 네 차례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으나, 마지막 잡혀간 날이 1987년 ‘6·29 선언’을 한 다음날이라 간신히 옥살이를 면하고 훈방 조처됐다. 군에서 제대한 노 대표는 1993년 4월 친구들이 모아준 1년치 등록금으로 겨우 대학을 졸업했다. 회사에 취직해 기술 영업을 하던 그는 회사에서 자행되던 비리를 보고 10~20년 뒤 자신의 모습이 보여 괴로웠다고 했다. “제 가치관과 충돌했죠. 월급쟁이의 한계를 느끼고,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다른 길을 찾던 중 장사해서 돈을 벌기로 했습니다.” 노 대표는 당시 ‘이렇게 평생 살려고 태어났나’ 싶은 회의감에 빠졌다가 장사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목표는 확실했다. “1년에 1억원씩 벌자.” 노 대표는 20년 뒤 20억원을 벌어 10억원은 건물을 사고, 10억원은 운동 자금으로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노 대표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있던 해,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서 가게 점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어려웠죠. 그래서 죽어라 일만 할 수밖에 없었죠. 은행 이자도 못 갚아 알아서 연장근로 하기 일쑤였고, 잠도 하루에 3시간씩 잤습니다.” 노 대표는 시장 일이 워낙 힘들다보니 오래 붙어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만두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 몫까지 대신 일해서 혼자 4명분 일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거의 신용불량자가 될 정도로 빚이 늘어났습니다.” 당시 결혼한 노 대표는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에서 전세를 살다가, 출퇴근길이 멀어 시장이 있는 가락동에 집을 사서 이사하기로 했다. 당시 5300만원을 은행에서 빌려 9천만원짜리 집을 샀으나, 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 여파로 집값이 5천만원대로 떨어져 반토막이 났다. 월급 100만원으로 매달 은행에 내야 하는 이자 75만원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일요일도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고, 많은 빚이 오히려 김 대표가 마음을 다잡게 하는 계기가 됐다. “도매 장사를 하고 싶었는데, 소매 장사를 알아야 도매 장사를 할 수 있어 소매 장사를 배워보고 싶었죠.” 노 대표는 우연히 트럭에 물건을 싣고 다니며 파는 ‘차 장사꾼’을 만나 2년 동안 소매 장사를 배웠다. “구경 갔다가 홀딱 반했죠. 5개월 동안 월급 안 받을 테니 제자 삼아달라고 했습니다.” 차 장사는 밑천이 적게 드는 게 가장 큰 이점이었다. 어느 정도 장사 수완을 익힌 노 대표는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장사 밑천을 만들었다. “15명에게 내가 5년 뒤 장사할 거니까 투자 좀 해달라고 했죠. 12명한테 1천만원씩 1억2천만원을 받았습니다.” 노 대표는 2001년 말 친구들에게 빌린 돈으로 가락동에 채소가게를 차렸다. 매일 목표액을 정하고, 목표액을 채우지 못하면 나태한 탓이라고 여겨 다음날 밥을 먹지 않았다. “내가 망해서 친구들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한국에서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했죠.” 그는 “3일 동안 밥을 먹지 않은 날도 있었다”고 했다. 노 대표는 3년 동안 노력한 끝에 친구들 빚을 다 갚고 천호동에 7평짜리 가게를 샀다. 2003년에는 가게를 팔고 집을 줄여서, 관악구 조원동에 80평 규모의 슈퍼마켓을 인수했다. 노 대표는 2006년 은행나무마트를 인수해 운영하기 시작했고, 2012년 느티나무마트, 2013년 소나무마트를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친구들에게 빌린 돈도 다 갚고 팔자에 없는 돈까지 벌고 나니 옛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평소 제가 잘 따르던 분에게 어떻게 할까 여쭤보니 좋은 데 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노 대표는 “학생운동도 사회적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시작했다”며 “지금껏 기부를 해와도 사회에서 받은 혜택에 비하면 아직 미약한데 조금이나마 이웃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이충신 선임기자 c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이처럼 노 대표가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데는 어머니 영향뿐만 아니라 남다른 사연이 있어서다. 인하대 기계공학과 84학번인 노 대표는 1980년대 당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무시무시한 군사독재 정권 시절 네 차례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으나, 마지막 잡혀간 날이 1987년 ‘6·29 선언’을 한 다음날이라 간신히 옥살이를 면하고 훈방 조처됐다. 군에서 제대한 노 대표는 1993년 4월 친구들이 모아준 1년치 등록금으로 겨우 대학을 졸업했다. 회사에 취직해 기술 영업을 하던 그는 회사에서 자행되던 비리를 보고 10~20년 뒤 자신의 모습이 보여 괴로웠다고 했다. “제 가치관과 충돌했죠. 월급쟁이의 한계를 느끼고,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다른 길을 찾던 중 장사해서 돈을 벌기로 했습니다.” 노 대표는 당시 ‘이렇게 평생 살려고 태어났나’ 싶은 회의감에 빠졌다가 장사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목표는 확실했다. “1년에 1억원씩 벌자.” 노 대표는 20년 뒤 20억원을 벌어 10억원은 건물을 사고, 10억원은 운동 자금으로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노 대표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있던 해,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서 가게 점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어려웠죠. 그래서 죽어라 일만 할 수밖에 없었죠. 은행 이자도 못 갚아 알아서 연장근로 하기 일쑤였고, 잠도 하루에 3시간씩 잤습니다.” 노 대표는 시장 일이 워낙 힘들다보니 오래 붙어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만두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 몫까지 대신 일해서 혼자 4명분 일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거의 신용불량자가 될 정도로 빚이 늘어났습니다.” 당시 결혼한 노 대표는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에서 전세를 살다가, 출퇴근길이 멀어 시장이 있는 가락동에 집을 사서 이사하기로 했다. 당시 5300만원을 은행에서 빌려 9천만원짜리 집을 샀으나, 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 여파로 집값이 5천만원대로 떨어져 반토막이 났다. 월급 100만원으로 매달 은행에 내야 하는 이자 75만원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일요일도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고, 많은 빚이 오히려 김 대표가 마음을 다잡게 하는 계기가 됐다. “도매 장사를 하고 싶었는데, 소매 장사를 알아야 도매 장사를 할 수 있어 소매 장사를 배워보고 싶었죠.” 노 대표는 우연히 트럭에 물건을 싣고 다니며 파는 ‘차 장사꾼’을 만나 2년 동안 소매 장사를 배웠다. “구경 갔다가 홀딱 반했죠. 5개월 동안 월급 안 받을 테니 제자 삼아달라고 했습니다.” 차 장사는 밑천이 적게 드는 게 가장 큰 이점이었다. 어느 정도 장사 수완을 익힌 노 대표는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장사 밑천을 만들었다. “15명에게 내가 5년 뒤 장사할 거니까 투자 좀 해달라고 했죠. 12명한테 1천만원씩 1억2천만원을 받았습니다.” 노 대표는 2001년 말 친구들에게 빌린 돈으로 가락동에 채소가게를 차렸다. 매일 목표액을 정하고, 목표액을 채우지 못하면 나태한 탓이라고 여겨 다음날 밥을 먹지 않았다. “내가 망해서 친구들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한국에서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했죠.” 그는 “3일 동안 밥을 먹지 않은 날도 있었다”고 했다. 노 대표는 3년 동안 노력한 끝에 친구들 빚을 다 갚고 천호동에 7평짜리 가게를 샀다. 2003년에는 가게를 팔고 집을 줄여서, 관악구 조원동에 80평 규모의 슈퍼마켓을 인수했다. 노 대표는 2006년 은행나무마트를 인수해 운영하기 시작했고, 2012년 느티나무마트, 2013년 소나무마트를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친구들에게 빌린 돈도 다 갚고 팔자에 없는 돈까지 벌고 나니 옛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평소 제가 잘 따르던 분에게 어떻게 할까 여쭤보니 좋은 데 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노 대표는 “학생운동도 사회적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시작했다”며 “지금껏 기부를 해와도 사회에서 받은 혜택에 비하면 아직 미약한데 조금이나마 이웃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이충신 선임기자 c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