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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영근 시인의 10주기 추모 시 낭독회가 열린 지난달 28일 저녁, 그가 떠난 뒤 그의 시에 빠져들었다는 최병일 씨가 낭독회 뒤풀이 자리에서 58년생 동갑내기 고교 동창들에게 박 시인의 시를 들려주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시가 시민들의 삶에 다시 가까워지고 있다. 시집 판매가 늘고 낭송회도 많이 열린다. 지난달 28일 찾아간 고 박영근 시인의 추모낭독회에서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온기가 가득했다.
노동자 시인으로 유명했던 고 박영근 시인의 10주기 추모낭독회가 열린 곳은 광화문 교보문고. 최병일 씨는 익숙한 듯 객석 맨 앞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살아생전 박 시인이 아꼈던 후배 문인 김주대, 김해자, 문동만 시인이 고인의 시를 낭독했다. 박 시인의 시 세계와 생전에 그와 얽힌 추억담으로 낭독 분위기가 무르익자, 박 시인을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다는 최 씨는 추억담 대신 박 시인의 시 ‘벙치’를 들려주었다.
-박영근 ‘벙치’ 중에서
누구나 그 여자를 벙치라고 불렀다.
며칠 동안이나 내리는 눈 속에 고샅길도 끊기면
우리 집 정짓간 아궁이 곁에서
뜨거운 숭늉에 대궁밥을 말아 먹었다.
“대학 때 학교 구내서점에서 우연히 ‘취업 공고판 앞에서’라는 시를 보고 처음 박 시인을 알게 됐습니다. 그가 2006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접하고 시집을 구입해 시를 읽기 시작했는데, 시가 너무 좋았어요. 그때부터 박 시인을 기리는 인터넷카페에 가입하고 추모행사에도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최 씨는 고인과 같은 58년 개띠. 쓸쓸히 세상을 떠난 시인에게 동갑내기 친구들을 잔뜩 만들어주고 싶었던 걸까. 최 씨는 이날 낭독회에 자신의 고교 동창들을 초대했다. “조용히 혼자 올까 하다가 동창들과 함께 시를 나누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박영근 시인을 모르는 친구들에게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작 시인이며, 우리하고 같은 58년 개띠라고 했더니 12명이나 와주었어요.”
동창들 사이에서 최 씨는 ‘시 전도사’로 통한다. 100여 명이 가입한 동창회 단톡방에도 최 씨는 틈틈이 시를 올린다. “시인보다 더 시인 같은 친구입니다. 우리는 시인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이고. 하하.” 최 씨 손에 이끌려온 조상식 씨는 태어나 처음으로 시 낭독에도 나섰다. “별생각 없이 ‘물의 자리’라는 시를 낭독해봤는데 읽다보니 감정이 울컥하더라”며 첫 낭독의 소감을 전한다. 낭독의 여운이 길었던 걸까. 인근 주점으로 자리를 옮긴 최 씨와 58년 개띠 동창들은 술잔을 기울이고 시집을 펴 시를 낭독했다. “우리는 시에 대해 배울 기회도 읽을 시간도 없었지요. 나이 오십이 넘고 환갑이 다가오니 시가 좋아지네요. 시가 주는 울림이 좋아요.”
시인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어쩌면 가장 열렬한 독자이자 동갑내기 친구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윤지혜 기자 wisdo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박영근 ‘벙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