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우리’

동아시아 객가인, ‘밑으로부터 만들어진’ 공동체 이루다

길 위에서 만난 ‘우리’ ⑨ ‘민족, 상상의 공동체’론의 반증인 객가인과 그들의 주거지 ‘토루’를 찾는 푸젠성 여행

등록 : 2021-08-12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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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코넬대 교수였던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을 ‘위로부터 만들어진 이념’ 주장


그러나 중원 한족, 푸젠성으로 쫓겨와

1700여 년 여러 국가 거치는 동안에도

‘객가인’으로 자기 정체성 유지해오며

주거이며 방어시설인 ‘토루’ 발전시켜



객가를 알타이 산맥 하카스족과 비교한

민족사학 일부의 주장은 지나친 비약


대만에서 객가를 ‘하카’라 발음하지만

이는 ㄱ이 ㅎ으로 바뀐 단순 음운 현상

민족 이동 보여주는 어떤 흔적도 없고

언어 차이도 너무 크다는 점 간과한 듯

전라갱 토루. 장방형 토루가 가운데 있고 원형 토루가 4개 있다. 그래서 1탕4찬이라고도 한다.

2015년 대만에서 중국 쪽을 바라보며 샤먼(廈門), 취안저우(泉州), 장저우(漳州) 등 푸젠성(福建省·복건성) 세 도시를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 중 샤먼은 중국 최초의 개항지기도 해서 ‘중국의 나폴리’라는 별칭까지 있다. 샤먼을 또 아모이(Amoy)라고도 하는데 아모이는 샤먼의 옛 이름을 푸젠성 방언으로 부르는 사투리였다고 한다.

이 세 곳은 이질적인 서구 문화와 동양 문화가 섞인 묘한 곳이다. 중국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라는 이유로 중국인들이 꼭 가보고 싶은 도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푸젠성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명나라 병사들 중에서 복건성이 고향인 이들이 많다”고 말한 곳이고, 또 명·청대에는 대만으로 이주한 사람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 중 마르코 폴로의 유적으로 유명한 취안저우는 천주교와 관련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2015년과 2019년, 두 번에 걸쳐 푸젠성을 다녀왔다. 처음에는 푸젠의 성도인 푸저우(福州), 샤먼, 동북방면의 우이산(武夷山), 그리고 서쪽방면의 난징(南靖)으로 향했다. 난징은 15~20세기에 걸쳐 지어진 46채의 가옥으로 이뤄진 토루(土樓)로 유명한 곳이다.

4층 복도에서 찍은 유창루 토루. 270개나 되는 유창루의 방들은 모두 동일한 크기다. 5개의 성씨집안이 함께 건축해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1층은 부엌, 2층은 창고, 3~4층은 침실, 5층은 창고로 사용하고 집안별로 우물이 있고 한가운데에는 조상에 제사 지내는 장소가 있다. 3층 기둥이 오른쪽으로 구부러지고 5층 기둥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를 동왜서사(東歪西斜)라 한다. 안전을 위한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두 번째 방문에서는 토루와 샤먼, 그리고 샤먼시에 있는 섬 구랑위(鼓浪嶼)를 중심으로 여행했다. 결국 광둥성 동부에 있는 한강(韓江)까지는 가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중부지방과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漢江)은 한나라 한(漢) 자를 쓴다. 그러나 광둥성 동부에 있는 한강(韓江)은 우리 국호와 동일한 나라 한(韓) 자를 쓴다. 마치 두 개의 강 이름이 바뀐 듯해서 한 번은 가보고 싶었으나 일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민(閩) 지방으로 불리는 푸젠성은 민난어와 민베이어로 남북의 언어가 갈린다. 북쪽의 우이산은 옛 중국 고사 속에 나오는 무릉도원이라고 주장되는 곳이다. 우이산은 특히 송나라 성리학자 주희가 터를 잡고 공부를 했던 곳이어서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에게는 더욱 이상향처럼 여겨지던 곳이다.

그러나 주희의 고국인 송나라는 거란족과 북방의 유목민족들에 휘둘려 이후 남쪽으로 쪼그라들었다. 송나라만이 아니다. 명나라가 망할 때도 끝까지 저항했던 남명의 정성공의 유적이 이곳 푸젠성에 있다. 그러고 보면 푸젠성은 가장 확실한 한족의 국가인 송과 명이 마지막 운명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 20세기에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대 격돌이 벌어진 장소도 이곳 푸젠성의 샤먼이었다.

푸젠성의 명물은 뭐니 뭐니 해도 객가(客家)와 객가인(客家人) 그리고 그들의 건축물인 토루다. 미국 코넬대 국제학과 명예교수를 지낸 베네딕트 앤더슨(1936~2015)은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불렀다. 17~18세기 서유럽의 민족주의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국민국가 차원에서 ‘위로부터 만들어진 이념’이라는 주장이다.

샤먼의 이국적인 거리. 다른 지역에 비해 깨끗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아시아 여러 민족이나 종족에 일반화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객가인이다. 객가인은 푸젠으로 이주한 황하 근방의 한족을 가리킨다. 이들은 중국 서진 말인 4세기, 북방의 5개 이민족이 일으킨 대침공인 ‘영가의 난’ 때부터 이주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욱이 그 이후에도 수·당시대 선비족의 치세를 회피하여 남쪽으로 지속적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족 정권이 들어선 송나라 시기에 이동을 멈추었다가, 몽골의 원나라 때 다시 전쟁을 피해 한족이 남방인 푸젠성으로 이동하게 된다. 외지에 정착한 이들 한족은 호적이 없어서 ‘객가’라고 불렸다. 이런 이주의 역사를 통해 객가라는 특수한 한족 집단이 만들어졌다.

이후 남방의 한족들과 동화되기도 했지만, 갈등을 빚기도 해 산으로 들어가 ‘토루’라는 그들만의 독특한 집단주거 건축물을 만들었다. 토루는 안쪽에 개방형 마당이 있는데, 이 마당을 중심으로 바깥쪽이 원형이나 사각형 모양으로 건축되었다. 출입구는 단 하나, 창문도 2층 이상에만 만들었다. 한 채의 토루에 최대 8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주거이자 요새였던 이 토루는 200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객가인은 주로 광둥성 동부와 푸젠성 등지에 살고 있으며 대만에도 상당수가 살고 있다. 나아가 싱가포르나 인도네시아, 필리핀까지 상권을 확대하며 동양의 유대인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단결과 상술이 뛰어나다. 지금의 시장사회주의를 만든 덩샤오핑 중국공산당 지도자, 싱가포르의 건국 지도자 리콴유, 대만의 현 총통 차이잉원 등이 모두 객가인이다. 주윤발이나 장국영, 장만옥 같은 홍콩 영화배우에서 한국의 유명한 이연복 셰프까지 유명인이 많다. 인구가 전세계에 8천만 명이나 되니 그럴 법도 하다.

일각에서는 객가인을 러시아 알타이 산맥과 남시베리아의 하카스공화국에 거주하는 하카스족이 이동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김정민,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 2016, 글로벌콘텐츠 펴냄). ‘객가’를 본토에서는 ‘커지아’라고 발음하지만, 대만에서는 ‘하카(hakka)’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하카스’와 ‘하카’의 발음의 유사성에서 출발한다. 하카스는 튀르크 계통의 유목인이고, 시베리아와 알타이 지방의 하카스어는 튀르크계 언어인데, 자신들의 언어까지 잃어버리고 중국어의 방언인 하카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집단적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민족과 종족의 이동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인데 하카스와 하카의 문화적 연결점은 거의 없다. 나아가 객가가 하카가 되는 것은 ㄱ이 ㅎ으로 바뀌는 음운 현상일 뿐이다. 더군다나 하카스어는 튀르크계 언어라 어순이 ‘주어-목적어-서술어’로 우리말과 일치한다. 반면 하카어는 중국어, 영어처럼 ‘주어-서술어-목적어’ 어순이기 때문에 어순까지 바꿔가며 언어가 변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인도·유럽어군이라는 페르시아어와 힌디어, 라틴어, 초기 고트어는 우리말과 어순이 같지만 서유럽의 언어들은 술어-목적어 어순이 다르다. 하카어와 하카스어 간 유사성의 근거로 단지 중요한 어휘를 동일하거나 유사하게 가지고 있다는 점을 꼽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카어와 하카스어는 유사한 어휘도 없고 어순도 다르다. 하카어의 한자 발음은 지금의 베이징어보다는 일본어나 한국어의 한자 발음과 더 가깝다고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하카어는 오래전 중원지방에서 한자를 사용하던 집단이 남방으로 이주하여 나온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구랑위 모습.

샤먼의 앞바다에 구랑위라는 섬이 있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집들과 거리가 마치 이국적인 곳에 온 듯하다. ‘유럽의 동양화’와 같은 묘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구랑(鼓浪)은 파도를 일으킨다는 뜻의 한자인데, 파도가 일어날 때 구랑구랑 소리가 난다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말 발음으로 서인 위(嶼)는 섬을 뜻한다. 위는 작은 섬을 뜻하는데 도서(島嶼)에서도는 큰 섬, 서는 작은 섬이다. 섬을 일본어에서는 시마라고 하는데, 한국어 섬에서 ㅁ 받침이 새로운 음절을 만들어 시마라 한 듯하다. 여러 생각이 구랑구랑 파도처럼 감돈다.

글·사진 장운 자발적 ‘우리 흔적’ 답사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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