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탄생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 일상을 연극으로 만든다”

⑧ 국립극단 ‘창작공감’ 작가부문 선정 배해률 작가가 들려주는 ‘희곡쓰기’

등록 : 2021-11-11 15:24 수정 : 2022-06-0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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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립극단의 ‘창작공감’ 작가부문에 선정된 배해률 작가가 지난 5일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워크숍을 마친 뒤 자신의 희곡 쓰기에 대해 설명하고있다. 배 작가는 “매끄럽지는 않더라도 사람들이 잠시 멈춰 생각할 수 있게 하는 희곡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경영학 인간 이해’ 안 맞아 연극 시작

처음엔 ‘매끄러운 작품’ 중요시했지만

매끄러움보다는 ‘인간 이해 필요’ 인식

‘일상 살아내는 것’ 싸움인 사람들 통해

“관객, 잠시 멈춰 생각하는 희곡 쓰고파”

백성호장민호극장의 공연장 문을 열고 나오는 배해률 작가


‘매끄럽게 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국립극단이 올해 작품개발 사업으로 진행하는 ‘창작공감’ 작가부문에 선정된 배해률(29) 작가가 최근 희곡을 쓸 때 가장 염두에 두는 생각이다. ‘창작공감’ 작가부문은 국립극단이 연초에 3명의 작가를 선정해 1년 동안 작품 제작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배해률 작가와 함께 김도영·신해연 작가가 선정됐다.

지난 5일 인터뷰 전문 작가인 은유 작가(왼쪽 셋째)가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에서 올해 ‘창작공감’ 선정 작가 등을 대상으로 ‘인터뷰 기법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세 작가는 드라마투르기 역할을 맡은 전영지 운영위원과 함께 지난 4월부터 월 1~2회 워크숍을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다. 작가들은 지난 11월5일에도 간첩조작 피해자 인터뷰를 묶은 <폭력과 존엄 사이> 등 책을 펴낸 은유 작가와 함께 ‘인터뷰 기법 워크숍’을 진행했다. 배 작가 등은 이번 워크숍이 극 중 캐릭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냈다. 배 작가 등 세 작가는 이런 워크숍과 집필 과정을 거쳐 내년 상반기 작품을 완성해 정식으로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배해률 작가는 군 의문사와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망사건을 다룬 <7번국도>(2018)와 일상 속 폭력의 굴레를 얘기하는 <비엔나소시지 야채볶음>(2019)을 썼고, 소외된 사람들이 서로 기대는 이야기를 담은 <사월의 사원>은 올해 ‘제11회 벽산문화상’ 희곡부문에 당선됐다.

배 작가는 그의 작품들이 추구하는 것은 ‘매끄러움’이 아니라고 한다. 배 작가는 “매끄럽지는 않더라도 사람들이 잠시 멈춰 생각할 수 있게 하는 희곡을 쓰고자 한다”고 말했다.

배 작가도 사실 처음에는 누구보다도 ‘매끄러움과 전형적인 틀’을 중요시했다.

그는 학부 때 경영학을 공부했는데, 금방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고객들에게 상품을 팔기 위해 인간 심리를 파악하는” 경영학의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와 맞지않았다.

연극을 통해 다른 관점에서 인간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에 군대에서 제대하고 난 뒤 2016년부터 희곡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학로의 사설 희곡 학교인 ‘라푸푸서원’에 등록했는데, 3차례나 등록할 정도로 열심히 배웠다. 이후 2018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전문사로 입학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목표로 삼은 것은 “희곡 쓰기의 왕도를 찾는것”이었다.

‘왕도 찾기’는 매끄럽고 전형적인 글쓰기추구로 나타났다. 배 작가는 “어떻게 플롯을 구성하면 더 극적일 수 있을지, 갈등은 몇 페이지부터 시작돼야 하는지 등에 대해 강박적일 정도로 집착을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매끄러움이나 플롯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깨달았다. 그것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그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계기는 <7번국도>였다. 그의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7번국도>의 출발점도 ‘분노’였다.

‘왜 이런 문제가 아직도 발생하고 해결되지 않는가’ 하는 분노가 그에게 <7번국도>를 쓰게 했다.

하지만 그는 금세 ‘내가 과연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 자격이 있는가’라고 자기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과연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라는 두려움이 일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도 없이 희곡을 쓰면 그 사람들을 대상화 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경우 사회적 통념에 따라 그분들을 재단할 수도 있는데, 이는 그분들에 대한 ‘2차 가해’가 될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매끄러운 구성’이 아닌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그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자신의 중심 주제로 택한다.

그는 이제는 “매끄러운 구성이라고 평가받으면 아쉽다”는 데까지 생각이 나아갔다. 주류적인 시각에서 볼 때 매끄럽지 않더라도, “많은 관객이 잠깐 멈춰 소외된 이들의 시각에서 살펴보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뒤 배 작가의 글쓰기 방법도 바뀌었다. “이야기를 만들 때는 처음에는 비교적 단정하게 쓰지만, 이후 소외된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것을 흩뜨려놓고 비틉니다.”

배 작가가 쓴 초고는, 그가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쓰려고 할지라도, 비장애인·비퀴어 등 ‘주류적 목소리’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따라 배 작가는 초고를 쓴 뒤, 다시 한번 소외된 사람들의 시각에서 자신이 쓴 글을 ‘흩뜨려놓고 비틀게’ 되는 것이다. 그결과 그가 기대하는 것이 바로 ‘관객들이 잠시 멈추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가 지향하는 연극은 어떤 것일까. 그는 “‘일상’을 매개로 동시대의 크고 작은 비극들을 마주하려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때의 일상은 이 땅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일상이다.

물론 누군가는 ‘일상이 연극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던질 것이다. <시학>을 쓴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뒤의 많은 작가들이 연극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일상을 넘어선 갈등’을 꼽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 작가는 “어떤 일상은 그 자체만으로 극이 된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가령 청소를 한다고 할 때, 어떤 집의 경우에는 곰팡이가 슬 수밖에 없는 일상일 수밖에 없고, 어떤 집은 곰팡이가 전혀 없는 환경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일상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싸움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 작가가 국립극단과 함께 개발하고 있는 작품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도 이런 그의 희곡론과 닿아 있다. 작품은 선한 마음을 가졌기에 소외되는 사람들의 아픔과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얘기한다.

배경은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오랫동안 플라스틱 재활용 선별장에서 쓰레기를 분류해내는 선한 마음의 지혜는 소방관인 정현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그러나 동성인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화재 현장에서 물불을 안 가리고 구조 작업을 하는 정현과 인공지능(AI)에 일자리를 빼앗긴 지혜가 모두 일찍 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졌던 마음과 희망마저 단절된 것은 아니다. 정현의 조카 영원이 두 사람의 마음을 이어받아 아름다운 동화를 그리는 작가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과연 지혜·정현·영원 세 사람의 ‘일상과 희망’은 내년 상반기 정식 공연 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배 작가가 이들의 일상을 꼼꼼히 엮어나갈 내년 작품이 벌써 기대된다.

글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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