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만학도에게 ‘배움의 길’ 열어주는 벗”

50주년 맞은 송파구 평생교육시설 ‘신명실업학교’ 이동철 교장

등록 : 2024-07-25 16:30 수정 : 2024-07-25 17:59

크게 작게

설립 50주년을 맞은 신명실업학교는 청소년 학교로 시작해 현재는 만학 성인 대상 초중고 과정의 평생교육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12일 이동철 교장이 졸업생들의 수학여행, 졸업여행 사진들을 보며 설명하고 있다

교인 봉사자로 시작, 1991년 학교 인수

만학 성인 대상 초·중·고 과정 운영

1만 명 졸업, 현재 200여 명 배우는 중

“지역 재개발로 이전 공간 마련 과제”


‘신명실업학교’는 송파구 마천동 남한산성 입구 버스 종점 앞에 있다. 학교 형태의 평생교육시설로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1970년대 마천동은 도심 개발로 이주한 사람들이 판잣집을 짓고 어렵게 살던 동네였다. 지역 교회 교인들이 뜻을 모아 1973년 새마을청소년 학교로 문을 열었다. 1992년 배움의 기회를 놓친 성인을 위한 평생교육 기관으로 탈바꿈했고, 2003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100평 규모 2층 건물의 학교 교무실과 교실, 복도 등에선 세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배움에 한 맺힌 어두운 나날들/ 늦은 나이 까막눈 비비고 일어나니/ 어릴 적 꿈들이 되살아나네.” 1층 계단 벽면을 채운 졸업생 시화 작품 속엔 뒤늦게 배우면서 느낀 기쁨과 애틋함이 담겼다. 교무실엔 초창기 청소년 학생들이 학교 대항 축구, 배구 시합 등에 나가 받은 우승컵 20여 개가 전시돼 있다. 2012년 송파구에서 받은 교육 분야 구민상 상패도 보인다. 2층 계단 벽면엔 수학여행, 졸업여행 사진들이 빼곡하게 걸렸다.

이동철(68) 교장은 교인 봉사자로 학교와 인연을 맺었다. 1991년 청소년 학생 수가 크게 줄어 운영이 어려워진 학교를 인수했다. 12일 <서울&>과 만난 이동철 교장은 그간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사회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우리 학교를 찾는 이들에게도 변화가 있었다”며 “용기 내 배움의 길에 나서는 학생들이 꾸준히 이어져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1990년대 중학교 의무교육이 시행되면서 학교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을 때, 만학도 주부들이 학교 문을 두드렸다. 그래서 한때 신명주부학교로도 불렸다. 2000년 중반쯤엔 지역의 결혼 이주자들이 한국어를 배우러 왔다. 많을 때는 학생 수가 500~600명에 이르렀다. 그동안 중고등 과정 학생 1만여 명이 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학생 대부분은 60대 이상 여성이고, 고령층 남성 학생도 있다. 성인문해교육센터, 다문화지원센터 등이 생기면서 학생 수가 줄었지만, 여전히 200여 명의 만학도가 배움의 길을 함께하고 있다. 중등(1년), 고등(1년), 전문과정(컴퓨터 등)에 초등은 한글반(학력인증반)으로 운영한다. 이 교장은 “서울시교육청의 지원금, 송파구청의 프로그램 지원비가 일부 있지만 학교 예산 대부분은 학생들이 내는 수업료가 차지한다”며 “노인연금 등으로 빠듯하게 사는 학생들은 몇만원의 수업료도 부담돼 나눠 내기도 한다”고 전했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가 2년 넘게 이어지면서 학교는 심각한 상황을 맞았다. 수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14명이던 교사는 절반으로 줄었다. 학교 문을 닫아야 할지 고민할 정도로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가 학교 운영을 이어오는 이유는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이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오랫동안 봐왔기 때문이다.

평생을 문맹으로 살아온 이들이 한글을 깨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짧게는 1~2년, 길게는 10년 넘게 걸리기도 한다. 이들이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곁에서 도와주는 역할이 꼭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교장은 “길거리 간판 등에 있는 글씨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할 때 함께 기뻐해주고, 응원해주는 벗으로 살아온 삶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10~20년씩 학생들과 함께해온 교사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다. 교사 대부분은 전직 교사나 학원 강사, 평생교육사 등의 이력을 지녔다. 이들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고민 상담도 해왔다. 그는 “교사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우리 선생님들은 천사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학교는 한글을 깨우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한 교육도 해왔다. 한글을 깨치지 못해 운전면허 필기시험 보기가 어려웠던 이들을 위해 무료 수업을 진행했다. 그 덕분에 200여 명이 면허증을 따서 생업에 종사하거나, 가족 돌봄 등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신명실업학교가 위치한 지역은 현재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마천3 재정비촉진구역으로 바로 옆 4구역은 9월부터 이주가 진행될 예정이다. 3구역 재개발 추진은 5월 서울시 건축심의를 통과했다. 학교 건물과 부지는 송파구청 소유다. 이 교장은 “송파구청에 월세를 내며 이용하고 있다”며 “이전할 곳이 마땅히 없어 불안하고 막막한 상황이다”라고 했다.

이 교장은 배움의 시기를 놓쳐버린 성인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는 벗으로의 역할을 10년 정도 더 이어가길 바란다. 고령층 가운데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하거나 중고등 과정 수업을 듣고 싶어 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소풍, 수학여행 등 학교생활도 경험하면서 못다 이룬 꿈을 꿔볼 수 있게 도왔으면 한다. 그는 “안정적인 공간에서 학생들이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의 수업료를 내며, 즐겁게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운영하는 게 제게 주어진 사명이자 과제다”라고 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