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죽은 이에게 띄우는 사랑의 노래죠, 이 묘비명은 모두”

현충일 앞두고 국립묘지 묘비 채록해 책으로 펴낸 조재구씨

등록 : 2016-06-03 10:17 수정 : 2016-06-03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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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서울과 대전의 국립묘지를 찾아다니며 묘비명을 채록해 온 조재구씨가 동작동 현충원 사병 묘역의 한 무덤 앞에서 가족들이 남긴 추모글을 살펴보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현충일을 앞두고 찾아간 동작동 현충원은 고요한 가운데 행사를 준비하는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서울 동작동과 대전 갑동 두 곳으로 나뉘어 있는 우리나라 국립묘지에는 총 29만여 위의 무덤과 위패가 있다. 외세와의 투쟁, 동족 상잔의 비극, 냉전의 희생이 낳은 영광이자 비극의 집합소이다. 강토의 북녘 땅에도 이만큼의 죽음들이 진혼의 대상일 것을 생각하면 지난 세기 우리 민족을 덮친 거대한 비극의 실체가 가슴에 사무친다.

동작동 국립묘지 ‘만남의 집’에서 조재구(64)씨를 만났다. 그는 최근 국립묘지에 남겨진 글귀들을 채록한 묘비명 모음집 <님은 조국의 별이 되어>(엠시엔미디어)를 펴낸 사람이다. 국립묘지 묘석은 앞면에 관등 성명, 뒷면에는 사망 일시와 장소만 적는다. 그래서 대개의 묘비명은 무덤 앞 상석 또는 가족들이 남긴 기념물에 새겨져 있다. 조씨가 채록한 묘비명들은 하나같이 절절한 감동의 시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남겨진 사람의 애절한 그리움이 감동의 원천이다. 조씨는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생긴 빈자리에 고인 슬픔과 원망에서 이 ‘시’들은 출발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기에 감동을 준다. 사랑이 있기에 죽음이란 절망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희망이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이 묘비명들은 모두 ‘죽은 이에게 띄우는 사랑 노래’다.”

-묘비명을 모으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31년 전 처음 국립묘지를 찾았을 때가 오후 하기식 무렵이었다. 소복을 한 여인이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묘비 앞에 앉아 있었다. 근처 개울에서 떠온 물로 비석을 정성스레 닦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 속에 비친 그 모녀의 애잔한 모습이 그렇게 강렬할 수가 없었다.”

묘역을 돌아보던 조씨의 눈에 드문드문 무덤 앞에 새겨진 추모의 글귀들이 들어왔다. 그것은 슬픈 모녀의 잔상과 겹치면서 전율 같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조씨가 해마다 몇 번씩 국립묘지를 찾아 묘비명을 채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삼촌이 6·25때 학도병으로 전사했다. 21살이었는데 시체도 찾지 못했다. 경남 함안의 시골 농부였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둘째 아들의 위패가 있는 이곳 동작동을 와 보지 못했다. 조카인 나도 서른이 넘어서야 현충탑을 찾아보게 되었으니…. 다들 가난했고, 제 한 몸 챙기기도 버거운 시대였다.”


조씨가 1985년부터 8년 동안 채록한 묘비명은 약 860여 편, 그 가운데 160여 편을 추려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는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은 것이 1992년이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책이 많이 팔려 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세속적인 생각은 지워지고 그의 가슴에도 사랑을 잃은 사람의 정한이 한켜 두켜 쌓여갔다.

“만날 때까지-어머니로부터”

오로지 이 한 마디만을 돌에 새긴 한 어머니의 깊고 깊은 슬픔의 심연을 어떻게 짐작이라도 하겠는가.(1969년 순직 육군상사 백우빈의 묘)

“아빠 보고파요 / 명섭, 연수, 광섭 / 여보 여보 당신의 민예요 / 당신의 영원한 아내로서 / 당신이 못다 한 일 / 다 하고서 당신 곁에 가렵니다.”

아버지를 빼앗긴 삼남매와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젊은 아내는 앞으로 살아갈 험난한 시간의 두려움 앞에서 죽음을 초월한 가족의 사랑과 책임을 함께 다짐한다.(1971년 월남 전사 육군 소령 김영정의 묘)

조씨는 20여년 만에 다시 책을 엮은 이유에 대해 ‘인연’을 말했다. “말없이 죽은 남편의 묘비를 닦고 또 닦는 젊은 아내와, 외마디 비명 같은 그리움을 토해내는 어머니의 통한이 내 기억 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이 일이 점점 더 내 일생의 사업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여년의 세월 동안 세상은 평화만 있지 않았다. 그새 또 많은 사람이 갈등의 희생양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만큼 묘비명들도 늘어났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이 묘비명의 사연과 의미를 다큐멘터리나 영화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사명감이 들었다. 내 인생 후반의 목표를 설정한 셈이다.”

-어떤 영화가 될까?

“특별히 남을 위해 살아 본 경험이 별로 없고, 성향도 비판적이란 소리를 듣지만, 국립묘지에 와 보면, 여기가 곧 우리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너무 영웅이 없다.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진정한 영웅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다.”

-보훈처나 국방부와도 그런 계획을 의논해 봤나?

“보훈처 관계자는 만난 적이 없다. 다만 책 수익금이 생기면 보훈처에 기부한다는 뜻을 책 말미에 밝혀 놓았다. 국방부나 국군방송 관계자들은 대부분 나한테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국가가 할 일을 대신해 줘서 고맙다고.”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묘비명을 꼽아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다음 두 편을 골랐다. 전쟁터에 불려나가 죽은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노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어느 이름 없는 산야에서 최후를 맞이했을 열사의 노래였다.

그리워라 내 아들아, 보고 싶은 내 아들아 / 자고 나면 만나려나 / 꿈을 꾸면 찾아올까 / 흘러간 강물처럼 어디로 가 버렸나 / 애달퍼라 보고파라 그 모습이 그립구나 / 강남 바람 불어오면 / 그 봉오리 다시 필까 / 잊으려 해도 못 잊겠네 / 상사에 내 자식아. -1990년 아빠 엄마가(1984년 순직 공군 소령 박명렬의 묘)

 

나의 무덤에 묘비가 쓸데없다/고향에 묻히어 한 줌 흙 되면 그뿐/이름 없는 꽃이나 한 그루 심어다오/나는 썩어 거름이 되리니/고향의 봄에 한 송이 더 많은 꽃이 되리라.(1964년 서거 애국지사 노성원의 묘)

조씨는 씨제이미디어 부사장 출신으로 중화티브이 사장, 씨제이헬로비전 대표를 지냈다. 중국에서 미디어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은 중국통이다. 한중미디어연구소를 세워 한국과 중국 사이의 미디어 교류와 중국 관련 콘텐츠 제작 사업 등을 하고 있다.

<서울&> 콘텐츠 디렉터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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